"신라는 새로운 문화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다가 일단 수용하자마자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격렬한 포용성과 적극성을 갖고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능력을 보였다. 이 같은 신라의 문화수용 양상과 대구인의 기질은 비슷한 면모를 보인다고 판단된다. 말하자면 대구사람의 기질속에는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묘한 양면성이 혼융되어 있는 것이다. 대구가 오로지 보수의 온상인 듯이 인식되어온 것은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지배 이데올로기에 오염되어 두 측면 가운데 한 측면만 두드러지게 드러난 결과가 아닌가 싶다."('역사속의 대구, 대구사람들', 주보돈)
그렇다. 신라에 맥이 닿아 있는 대구경북사람들은 일각의 폄하처럼 '보수수구'라는 왜곡된 모습만은 아니었다. 변화에 민감했고 혁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변화와 혁신에 목숨 던진 사람들
'불상을 닮은 경상도 사람'은 선택의 기로, 운명의 순간에는 목숨도 던졌다. 이런 정신은 시대를 초월, 이어졌다. 신라 변경 땅, 첫 불교가 전파됐던 경북 선산 모례(毛禮) 집엔 첫 비구니가 된 모례 누이 사씨(史氏) 이야기가 서려 있다. 그러나 불교가 공인받지 못하자 22세 이차돈은 527년 순교를 자청했다. 신라 불교는 사씨 결단처럼 이차돈의 순교로 싹 텄고, 고려 불교 500년으로 이어졌다.
순교 희생은 1천300년 뒤 수운 최제우도 비켜가지 않았다. 조선 500년 통치체제의 근간을 뒤흔든 동학을 창시한 수운은 죽음(41세)을 기꺼이 맞았다. 단군의 홍익인간, 신라의 유불도를 넘나드는 풍류(風流)와 맥이 통하는 동학을 창시한 그의 경주탄생은 필연일까? 시인 조지훈이 "수운이 국선 화랑 이래 고유종교의 유속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경주에서 났고 이 점에서 선도와 무교 검술 풍수 도참 등이 그 사상에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한 까닭이 됐다"고 해석한 것도 그래서일까.
동학은 경주 황오리 출생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1827∼1898)의 뒤 이은 순교로 지켜졌고 한때 300만 명이 넘는 교도를 가진 최대 종교였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종이공장 제지공이던 해월은 35세(1863년)에 스승 수운의 도통을 전수받아 1898년(72세) 교수형에 처해질 때까지 38년간 동학을 지켰다. 배운 것, 가진 것 없던 그는 '최보따리'란 별명처럼 탄압 속 전국 골골을 다니며 동학을 전파했다.
'사람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라'고 했던 그는 비폭력으로 교조 수운에 대한 신원(伸寃)운동을 벌여 '한국의 간디' 역할도 했다. 1894년 동학혁명 땐 10만 병력을 이끌고 전봉준과 합세, 관군'일본군을 상대로 전투(우금치)도 마다 않았다. 그는 동학의 기틀을 잡고 부흥을 일궈낸, 수운이 죽음 직전 해월에게 전한 것처럼 '높이 날고 멀리 뛴'(高飛遠走) 위대한 종교지도자였다.
이 같은 동학은, 조선 사상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퇴계 이황이 유학(성리학)을 조선에 뿌리 내리게 한 것을 마감하도록 했다는 평도 받고 있다. 수운이 창시하고 해월이 터전을 다진 동학의 두 지도자로 퇴계의 성리학 체제는 무너졌는지도 모른다. 퇴계와 수운, 경북이 낳은 두 거목으로 조선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 나는 세계를 경험했다. 세월의 망각으로 두 선각자를 배출한 지역후손들 '대접'(?)은 형편없지만 역사는 큰 지도자로 기록하고 있다.
착취당하는 백성을 하늘처럼 여겼던 수운과 해월의 순교는 훗날 1970년대 열악한 환경의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분신자살한 전태일에게로 이어진 것은 아닐는지. 또 독재 시절,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민주투사들에게 이어진 것은 아닌지. 동학에 대해 영남대 백승대 교수는 "우리 지역에서는 동학운동이라는 매우 혁신적인 움직임이 일어났다"면서 "동학은 기존의 것을 융합하고자 하는 발상은 새로운 판을 벌일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고 평가했다.
◆지식인들과 민중들의 새 세상 만들기
삼국의 변방, 신라는 변화를 잘 읽었다. 불교를 받아들였고 멀리 천축(인도)까지 바다로, 육지로 많은 승려들이 구도 길을 떠났다. 중국유학과 도교도 수용했다. 특히 신라 6두품 지식인들은 유학과 학문으로 변화와 혁신에 앞섰다. 세속오계의 원광법사와 대중불교의 길을 만든 원효대사 등은 불교로, 강수(외교문서)와 설총(이두문), 최치원(시무10여조) 등은 유학으로, 설계두(薛罽頭) 같은 이는 해외(당) 망명으로 변화와 혁신을 모색했다.
신라 지식인들은 새 시대 도래에도 민감했다. '계림(신라)은 누런 잎, 곡령(고려)은 푸른 솔'(鷄林黃葉 鵠嶺靑松)이라며 신라 멸망을 감지한 최치원과 그 문인들은 변화와 모험을 택했다. '(최치원)문인들이 고려 개국 초기 조정에 들어와 벼슬이 대관에 오른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고려 현종이 문창후(文昌侯'최치원)의 시호를 내렸다'는 기록은 이를 말해주고 있다.
신라말 3최(崔)였던 최치원'최언위'최승우의 선택도 비슷했다. 최치원은 왕건을 위해 견훤에게, 최승우는 견훤을 위해 왕건에게 보내는 글을 각각 썼고 최언위는 고려신하가 됐다(삼국사기'삼국유사)는 이야기가 그 뒷받침이다. 특히 최승로는 28개조 개혁안인 '시무28조'로 새왕조 고려의 국정운영 기본방향을 제시했다.
조선 개국 때도 경북 지식인들은 새 변화를 택했다. 절개를 지킨 정몽주(영천)와 다른 길을 간 정도전(봉화)은 성리학에 바탕을 둔 조선통치체제 기반을 닦았다. 절개를 지킨 길재(선산)의 후학 김숙자'김종직'김굉필 등도 조선 초기 기틀을 다졌다. 조선 성균관은 우리나라 18명 현인에 신라 설총과 최치원, 고려 안향과 정몽주, 김굉필을 배향했다.
변화와 혁신정신은 시대를 넘어 계승돼 포스텍(포항공대)을 세계적인 대학반열로 끌어올린 고(故) 김호길 총장을 비롯한 지역출신 지식인들에게 이어졌다.
민초들의 저항을 통한 변혁도 평가할 만하다. 신라 지배층 착취에 889년 일어난 상주농민항쟁인 원종(元宗) 애노(哀奴)의 난은 뒤 이은 농민반란과 신라붕괴의 기폭제였다. 892년 상주 가은(현 문경) 태생의 견훤이 신라에 반기를 들고 후백제를 세운 것도 이 무렵이었다.
천년 뒤 1894년 동학혁명은 새 시대의 서막이었다. 동학 농민혁명은 경상도 71개 군'현 중 무려 60개 군'현에서 일어났다. 상주'문경'예천 등엔 농민들이 관군과 일본군에 생매장, 총칼에 피흘린 흔적들이 수두룩하다. 동학혁명은 조선왕조의 마지막을 재촉한 민중저항이었다. 농민들은 침략 외세와 보수 부패왕조에 피와 목숨으로 맞섰다.
또 이승만 독재에 맞서, 야당후보 조봉암에게 1956년(제3대) 대통령선거 때 대구(72%)와 경북(44.7%)은 조 후보의 전국 평균(30%)보다 높은 지지를 보냈다. 전국 평균 70% 득표했던 이승만은 대구에서 27.7%에 그쳐 지역민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이런 저항은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물러나게 한 계기였던 1961년의 대구 2'28학생의거로 이어졌다. 대구경북의 야당성도 뿌리깊은 민중항쟁에 맥이 닿았으리라.
'역사 속의 대구, 대구사람들'의 필진이었던 충남대 허종 교수는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대구는 다른 어떤 곳보다 '열린 도시'였으며 대구시민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서 "항상 새로운 것에 민감하고 진취적인 기상으로 한국 현대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정인열 논설위원 oxe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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