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성환 교수의 세상보기] 연두와 안철수, 샌델의 사회

며칠 전 늦은 밤 시간에 아내와 함께 '도가니'를 보러 갔다. 2005년 발생한 청각장애인학교(광주 인화학교)의 성폭력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집사람은 이미 책을 읽었다고 했으나, 나의 궁금증 해소에 이끌려 갔다.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에 당사자인 청각장애인들도 이 영화를 보게 하면 어떨까를 이야기했다. 그들도 영화를 볼 권리가 있고, 세상이 자기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들이 우리와 함께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자막을 넣어야 한다. 우리는 이 조그만 배려도 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처지에 대해 분노한다. 이마저도 우리 가진 자들의 편견이 아닐까.

우리는 2008년의 나영이 사건을 비롯해 장애인, 아동 성폭행 관련 사건을 심심찮게 접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영화 한 편이 우리 사회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가. 영화는 검찰, 경찰, 법원, 교육청, 교회, 변호사 등 가진 자들의 카르텔 속에서 전개되는 사회적 약자(청각장애인)에 대한 억압의 구조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러한 억압 구조는 심각한 불이익을 받는 사람들에겐 일종의 강제 수용소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억압 속에서도 또래 중에 가장 영특하고 의젓한 연두는 교장에게 반복해서 성폭행을 당하는 지적장애를 가진 친구 유리를 동생처럼 돌본다. 재판정에서 성폭행의 주범인 교장을 응시하는 연두의 눈망울은 가슴을 짠하게 한다.

가해자들을 석방하라는 판결이 내려지는 순간 법정에서 '청각장애인들이 내는 알 수 없는 울부짖음'은 우리 사회에 드리운 불공정과 탐욕의 장막을 찢어주기를 바라는 외침으로 우리들에게 감정이입(empathy)되었다. 기댈 곳 없는 그들의 울부짖음을 외면하기 힘들게 했다. 나를 포함해 다른 사람에게도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으로 승화된 것이다. 너무나 진부하고 전형적인 우리의 이기심이나 탐욕과는 반대로 공정성이 살아 움직이는 공간에서 살고 싶어하는 사회공동체의 욕구 분출이다.

한국 사회의 거짓되고 불공정한 시스템을 흔들어 놓은 것은 도가니 속의 연두만이 아니다. 안철수 교수와 샌델 교수가 전하는 공정사회에 대한 신드롬이 그것이다. 안철수 교수는 정치를 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단 5일간의 그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기성 정치판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우리 사회를 출렁이게 했다. 미국, 영국 등 영어권에서 10만 권도 팔리지 않은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한국에서 100만 권 이상 팔렸다. 텔레비전에서는 그의 강의가 연속 방영되었다. 연두와 안철수와 샌델이 전하는 메시지는 같다. 개인의 가치와 존엄이 고립된 개인의 내적 성찰이 아니라 공적 공간에서 형성된 공동체에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공동체적 통합이나 지속적 발전을 위해서는 사회 경제적으로 가진 자가 스스로 나서서 가지지 못한 자와 암묵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도덕적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힘 있는 자가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공정성에 대한 기준을 새롭게 수립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영화가 개봉된 후, 네티즌의 서명운동, 법원과 검찰의 해명, 경찰의 재수사, 정치권의 도가니 방지법 제정 등 야단법석이다. 그러나 본질을 가리고 있다. 핵심은 장애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공정성 문제이다. 장애인을 보호하는 법률 하나로 들끓고 있는 도가니에 뚜껑을 덮어버리려 한다면, 가진 자들이 또다시 시대적 열망을 왜소화시키는 것이다. 공정성이라는 시대적 담론을 잠시 피어올랐다가 흩어지는 연무(煙霧)로 만드는 꼴이 된다. 그러면 청각장애 학생에게 성폭행을 한 교사가 다시 학교로 돌아왔는데도 학교가 정상화되었다고 주장하는 현실에서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사티아그라하(진실에의 헌신) 운동으로 말없이 인도를 변화시킨 마하트마 간디는 이런 말을 남겼다. "부자가 (탐욕을 버리고) 좀 더 검소한 생활을 해야 가난한 사람도 검소하게 살 수 있다"고. 이것이 도가니에 등장하는 피해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와 '나'를 지켜가는 것이다.

이성환(계명대 교수, 국경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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