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도가니'로 온 나라가 분노로 들끓고 있다. 가뜩이나 장애를 안고 남들보다 불편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가해진 무자비한 폭력에 치를 떨었고, 법의 심판 이후에도 제대로 풀리지 않는 억울함에 같이 가슴을 쳤다.
하지만 끓어오르는 분노를 자제하고 가만히 한번 생각해보자. 인권 사각지대에 놓여 억울함을 호소했던 장애인들의 사연이 비단 이 사건뿐이었던가. 돌이켜보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왜 우리는 그때마다 쉽게 잊어버리고, 또다시 새삼 새로이 접하는 사실인 양 공분을 쏟아내는 것일까?
◆'분노의 도가니'에 쏟아지는 관심
장애인'아동 성폭력 문제로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몰고 온 영화 '도가니'는 지난달 22일 개봉한 후 닷새 만에 100만 명의 관객을 기록하더니, 연휴 마지막 날인 3일까지 12일 만에 누적관객 수 280만 명을 돌파하는 등 인기몰이를 계속하고 있다. 영화의 핵심은 장애인학교에서 벌어진 성폭행 사건이었지만 부패한 경찰과 종교집단, 공무원의 무사안일, 약자를 제대로 보호해주지 못하는 무능한 법이라는 갖가지 사회의 허점이 한데 버무려져 사람들로 하여금 '부끄러운 현실, 그리고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영화가 개봉한 지 일주일여 만에 경찰은 사건이 발생한 인화학교에 대해 재수사를 결정하고 광주에 수사팀을 급파했고, 광주시교육청은 사실상 인화학교를 폐교할 방침을 밝혔으며, 급기야 이달 4일 광주시는 인화학교 사회복지법인인 우석에 대해 설립 허가를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6년 동안 모른 체 일관하며 꿈쩍 않던 관료와 정치인들이 고작 영화 개봉 1주일 만에 여론이 들끓자 '사후약방문' 격인 대책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성미 마음과마음 정신과 원장은 "영화라는 매체는 시청각적 이미지와 이야기가 결합되어 있어서, 내용전달이 용이하고 이미지를 매개로 서로 구체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파괴력이 있다"며 "그래서 같은 내용을 시사프로그램이나 소설로 다루는 것보다는 픽션이 가미된 영화가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현상이 빚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펄펄 끓는 여론이 모두 긍정적인 역할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언론과 네티즌들의 과도한 관심이 '도가니'의 실제 피해자들을 두 번 울게 하고 있는 것. 이미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버린 상처를 새삼 다시 꺼내는 것도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잇단 보도로 피해자들의 그룹홈과 공부방 등 생활공간이 고스란히 노출되면서 자신을 알아보지 않을까 마음을 졸여야 했다.
김 원장은 "성폭행의 상처를 입은 피해자를 치료하다 보면, 성폭행 상처 때문에 이사도 하고 이름까지 바꾸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고 우려했다. 성폭행 사건 피해자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경찰 조사나 재판 과정에서 겪게 되는 '2차성 외상'(secondary traumatization)이라는 것. 그는 "피해자들은 정서적으로 위축되어 있고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식으로 비슷한 뉴스만 들어도 불행감이 들고 자살 충동마저 느낀다"며 "다수의 단순한 분노는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2차성 외상을 가져다줄 수 있어서 상당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표면적 관심보다 근본 대책을
대한민국이 들썩일 정도로 사회적 약자들의 사연이 이슈가 된 사건은 이번뿐만이 아니다. 영화만 해도 이형호 군 유괴사건을 그린 영화 '그놈 목소리'(2007), 개구리 소년 실종사건을 다룬 '아이들…'(2011)은 아동'청소년 대상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폐지 움직임을 불러일으켰고, 공지영 작가의 또 다른 소설을 영화화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6)은 사형제 폐지 여론을 조성했다. 또 조두순 사건 때나 김수철 사건 때도 아동 성폭력에 대한 강력한 처벌책 마련과 아동지킴이 등의 대책이 줄이어 나왔지만 그때뿐, 사건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워졌다.
사회 다양한 이슈들도 줄이어 제기됐지만 그때뿐 결국은 해법을 찾지도 못한 채 슬그머니 사라지는 일이 부지기수다. 올해만 해도 6월 '반값 등록금'이 서울 광화문을 뜨겁게 달궜지만 이제는 그 힘이 상당 부분 사그라졌고, 독도문제나 중국의 역사왜곡 문제도 사건이 터질 때마다 국민들의 공분이 하늘을 찌르지만 잠시뿐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대구인권운동연대 서창호 상임활동가는 "사람들의 흥분과 분노가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까지 지속되지 못하는 점은 안타깝고 섭섭한 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계기라도 있어야 더디지만 약간의 진전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그는 "공분을 넘어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사회적 제도화가 마련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면서 "정신장애인이나 어린이'청소년들에 대한 항거불능 조항 삭제와, 성폭력 문제에 관한 배심원 제도의 폭넓은 활용, 양형기준 강화, 공소시효 폐지 등의 법적인 제도 정비는 당연히 행해져야 할 필요조건이며,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사회복지시설에 대한 감시감독을 강화해 투명성을 높이고 근무자들에 대한 인권'성 감수성을 높일 수 있는 교육을 병행하는 등의 실천적 변화가 마련돼야 한다"고 밝혔다.
◆시민 모두 일상적 감시자 돼야
끓어오른 분노를 어떻게 근본 해결책이 마련될 때까지 지속시키느냐 하는 것도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다.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언론은 벌떼처럼 달려들어 사건을 파헤치지만 지속성을 유지하지 못한다. 표면적인 사건에만 집착해 보도 경쟁을 벌이다 보니 사람들의 관심도 그렇게 유도될 수밖에 없고, 잠시 관심이 치솟았다 흔적 없이 사라지는 동일한 패턴이 늘 반복되는 것이다.
김성미 원장은 "공무원의 안일한 태도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지 못하는 법의 무능함은 우리가 분명 분노해야 할 일이지만, 분노와 공격성이 공통분모로 단결된 사회는 전체주의로 나가기 쉽다"며 "적절한 대상이 없으면 공격대상을 만들어서라도 공격을 하는, 이런 공격 일변도의 사회는 남을 파멸시키거나 자멸의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당한 분노는 사회를 변화시키고 성숙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원동력이 되지만, 사랑과 배려가 배제된 공격 일변도의 성향이 정당화되는 사회 풍조는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김 원장은 '도가니'로 인해 불거진 분노를 좀 차분하게 가라앉힌 뒤 사회구성원 전체의 인권의식이 진전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남대 사회학과 허창덕 교수는 "우리나라 지배권력 구조가 너무 공고하다 보니 본질에는 근접하지 못하고 현상에만 맴돌다가 사라지는 패턴이 반복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법과 제도가 원칙, 상식 수준에서만 집행이 돼도 괜찮겠지만 워낙 기득권에 의해 제멋대로 혹은 느슨하게 움직이는 사례가 잦다 보니 시민들은 여기에 지칠 수밖에 없게 되며, 더구나 문제의 본질을 떠나 지나치게 정치쟁점화가 되는 경우도 흔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허 교수는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기존 사회권력에 대한 냉소주의와 방관자적 태도 그리고 즉흥적인 반발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데,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민들이 '일상적 감시자'가 되어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추적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최근에는 과도한 관심으로 관련자에 대한 '신상털기'(신상정보 추적)도 공공연하게 행해져 문제가 되고 있다. '도가니' 사건만 해도 사건을 담당했던 판사에 대한 신상이 고스란히 인터넷에 까발려졌다. 김성미 원장은 "'신상털기'의 심리에는 희생양이 필요하기도 하고 관음증적 욕구도 내재돼 있다고 본다"고 풀이했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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