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내일은 내버려 둘 일이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기억인 듯싶다. 30, 40대 가장들을 인터뷰한 영상물을 본 일이다. 한두 명의 어린 자녀가 있고 자신들은 직장에 다니고 있는 평범한 남성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그들을 만난 장소는 회식자리 이거나 취미생활을 즐기는 곳이었다. 일과를 마치고 가지는 여유로운 시간일 것이라는 추측 때문에 유쾌한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목소리처럼 사는 것이 힘들다는 반응 일색이었다. 질문도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 일상이 어떠냐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대부분 옆집 아이는 값비싼 영어유치원에 다니는데 우리 아이는 그렇게 해줄 수 없으니 비참하다, 지금도 생활이 빠듯한데 노후는 자녀들에게 의지할 수도 없으니 큰일이다, 친구는 부장이 되었는데 자신은 퇴직을 당할지도 모르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행여나 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나올까 하여 마지막까지 지켜보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떠들썩하니 흥겨워 보이는 분위기는 흐릿한 배경이 되어서 한숨짓는 그들의 하소연을 지켜보는 이의 마음을 더 무겁게 했다.

처음에는 역시 돈이 문제로구나 하는 짐작을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비교하기 때문에 생기는 자괴감이 원인인 것 같았다. 좀 더 들여다보니 그 속에는 불확실한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크게 자리하고 있는 듯했다. 나이가 들어가면 수입도 줄어들 것이고 자녀들을 뒷받침해 줄 능력이 없어지면 어떻게 하나, 노후의 내 모습은 어찌 될까라는 걱정이 배어 나온 듯 보였다.

당장 어찌할 수 없는 현실에 부딪혀 숨이 막혀 보이는 이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새로 밝아올 날이 절망스러워 지금 이 순간을 포기하고 싶은 낭떠러지에 서 있는 사람은 아닌 듯싶었다. 닥쳐올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누구나 지니고 있지 않겠는가. 가정을 꾸리기 전에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만들어 갈 수 있는 앞날이라고 긍정적인 인식을 했을 터이다. 가장이라는 책임감에 용기를 갉아 먹히고 자조적인 한숨을 짓게 되었나 보다.

내일이라는 단어에는 희망이라는 의미가 숨어 있다고 믿어왔다. 보이지도 않는 미래를 꿈도 없이 맞이할 자신이 내게는 없다. 나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이미 지나온 시간들은 어찌하랴. 알 수 없는 미래라면 차라리 그대로 둬버려라. 하지만 지금 이 순간도 어쩔 수 없는 과거로 보태지는 마라.

영어로 현재(PRESENT)는 선물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내일은 어쩌지' 앞서서 고민만 하다가 눈앞에 놓여 있는 선물을 포장도 뜯지 못한 채 과거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라고 여겨본다. 오늘이 쌓여서 과거가 되고 현재는 또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게 해달라고 두 손을 모은다. 힘들어도 울고 싶어도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나를 다독인다. 답례도 원치 않는 현재라는 선물을 누려보자고.

이 미 영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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