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전 대구 중구 남산동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 안마당. 잔디밭 가운데에는 흰색 카펫이 길게 깔렸고, 그 끝에는 하얀 천으로 덮은 탁자가 놓였다. 곱게 잘라붙인 '축하합니다'라는 글귀와 여기저기 매달린 풍선 다발, 하객들을 위한 의자를 보면 영락없는 야외 결혼식장이다.
1915년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이 이곳에 터를 잡은 이래 수녀원에서 96년 만에 처음 결혼식이 열렸다.
특별한 장소만큼이나 이날 결혼식 주인공들의 사연도 남다르다. 신부인 니콜 핸키스(36'미국 시애틀) 씨의 한국 이름은 윤지연, 해외입양인이다. 하지만 그 이름과 생일(1975년 8월 7일) 모두 확실치 않다. 서너 살 때로 추정되는 1979년 9월 2일, 중구 동산파출소 직원이 수녀원에서 운영하던 백백합보육원(현 백합어린이집)에 니콜 씨를 맡겼다는 게 전부다. 니콜 씨는 이듬해인 1980년 2월 21일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미국으로 입양됐다.
결혼식이 시작되자 반주에 맞춰 신랑 대니얼 헨리(36'미국) 씨가 들뜬 표정으로 들어섰고, 꽃을 든 귀여운 화동 2명이 따라나섰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 니콜 씨가 모습을 드러내자 조용하던 식장에 일제히 "꺄아~"하는 환호성이 터졌다. 하객은 대니얼 씨의 부모와 가족, 니콜 씨의 양오빠 남성재(44) 씨 등 6명이 전부. 부족한 하객은 수녀님 40여 명이 대신했고, 모든 결혼식 준비도 수녀님들이 도맡았다.
천주교 대구대교구 정태우 아우구스띠노 신부의 주례사가 끝나자 두 남녀는 준비해 온 다짐과 감사의 메시지를 읽었다. 이어 수녀 20여 명이 축가 '렛 잇 비'(Let it be)를 부르자 니콜 씨가 눈시울을 적셨다. 하지만 눈물도 잠시, 가벼운 율동을 곁들인 수녀들의 발랄한 노래에 금세 환한 웃음을 지었다. 결혼식장은 웃음과 눈물로 뒤섞였다.
니콜 씨가 이곳에서 결혼식을 하게 된 것은 남편 대니얼 씨의 아이디어였다. 아내의 인생이 시작됐던 이곳을 또 다른 삶의 출발지로 삼자고 제안한 것. 대니얼 씨의 아버지가 1964년 주한미군으로 2년간 한국에 머물렀던 점과 역시 같은 가정에 입양된 양오빠 남성재 씨가 한국에 살고 있다는 점도 감안했다.
하지만 수녀원 결혼식이 전례가 없던 만큼 성사 과정은 쉽지 않았다. 니콜 씨가 김길자(58) 데레사 수녀에게 간절히 부탁했고, 김 데레사 수녀도 여러 경로로 협조를 얻은 끝에 승낙을 받았다.
김 데레사 수녀는 "백백합보육원 출신의 입양인이 친정이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니콜 씨도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껏 살면서 가장 특별한 일이에요. 제가 한 일이라고는 부탁을 하고 꽃을 준비한 것밖에 없는데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어요. 굉장히 고맙고 감격스러워요."
하지만 니콜 씨는 친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씻을 수 없다. 그녀는 지난해 9월 뿌리를 찾아 남편 대니얼 씨와 함께 이곳을 방문했지만 친부모를 찾을 수 있는 한 가닥의 실마리도 얻을 수 없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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