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옛길기행] <42>성주 영남우로

낙동 서편 서울 가는 영남우로,

중부내륙고속도로의 별티고개 아래를 지나가는 터널. 오른쪽으로 성주 옛길의 별티고개가 보인다.
중부내륙고속도로의 별티고개 아래를 지나가는 터널. 오른쪽으로 성주 옛길의 별티고개가 보인다.
항공촬영한 성주읍내 전경사진. 사진의 우측 끝자락인 성주읍 학산리 일대가 답계역이 위치했던 곳으로 현재 성주교육청, 성주소방서, 성주 향교가 자리 잡고 있다. 성주
성주 초전면 대장리의 의미바유지의 현재의 모습. 작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의마의 흔적을 지키고 있다.
항공촬영한 성주읍내 전경사진. 사진의 우측 끝자락인 성주읍 학산리 일대가 답계역이 위치했던 곳으로 현재 성주교육청, 성주소방서, 성주 향교가 자리 잡고 있다. 성주'정창구기자 jungcg@msnet.co.kr
성주 초전면 대장리의 의미바유지의 현재의 모습. 작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의마의 흔적을 지키고 있다.

조선시대 서울에서 전국으로 연결된 9개 대로 가운데 영남우로는 영남대로 만큼 널리 알려진 길은 아니지만 옛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다니던 길이었다. 이 길은 왜인들과의 교역을 위해 개방한 삼포(三浦) 가운데 한 곳인 제포(薺浦)에서 서울로 상경하던 왜사(倭使)들이 주로 이용했으며, 낙동강 서편의 경상우도 주민들이 이용하던 길이었다.

◆조선시대 무오사화를 불러온 김종직의 '조의제문'에 기록된 답계역

조선시대의 성리학자이며, 영남학파의 종조로 불리는 점필재 김종직은 세조 즉위를 비판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으로 타계 6년 후인 1498년의 무오사화로 인해 부관참시됐고, 제자들도 함께 목숨을 잃었다.

조의제문은 1457년 10월 김종직이 밀양에서 경산(京山'지금의 성주)으로 가다가 답계역(踏溪驛)에서 숙박하다 꿈에 신인(神人)이 칠장복(七章服)을 입고 나타나 전한 말을 듣고 슬퍼하며 기록한 글이다. 서초패왕 항우를 세조에, 의제(義帝)를 노산군(魯山君)에 비유하며 세조찬위를 비난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후 사관(史官)으로 일하던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이를 사초에 기록해 스승을 칭찬한 것이 무오사화의 발단이 됐다. 이 때문에 '조의제문'은 짧은 글임에도 불구하고 오래도록 회자되고 자주 인용되는 글의 하나가 되고 있다.

'조의제문'에 기록된 성주의 '답계역'은 조선시대 통영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영남우로(嶺南右路)의 주요한 역 가운데 한 곳이었다. 조선시대 사화를 초래한 역사의 무대가 됐던 답계역은 '댁기'라는 지명에서 그 흔적만 남아 있을 뿐 지금은 사라진 옛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됐다. 역만 없어진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왕래로 붐볐을 영남우로의 옛길도 찾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 이다.

◆중부내륙고속도로는 영남우로 성주옛길의 재현

옛 조상들이 이용했던 도로 상당수는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일부는 한때 기능이 쇠퇴하다 근래에 다시 사용하는 것과 완전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길도 있다. 성주를 통과하던 영남우로도 흔적도 남아있지 않은 쇠퇴한 길이었다.

그러나 2007년 중부내륙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일부 노선이 변경되기는 했지만 영남우로 성주옛길이 다시 열린 것이다.

영남우로 성주옛길은 성주의 남쪽 고령군과의 경계인 사원(蛇院)에서 시작해 조선시대 성주의 2대역의 하나인 안언역을 거쳐 별티고개, 답계역, 부상고개를 넘어 김천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중부내륙고속도로 성주구간도 성주 남쪽 선송리로 진입해 성주읍을 거쳐 부상고개를 지나 김천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과거 안언역의 지리에는 남성주 나들목(IC)이 자리잡고 있다. 옛 역은 중앙과 지방간 왕명과 공문서 전달 기능과 물자 운송, 사신의 접대와 숙박 편의 제공 등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고속도로의 진출입이 이뤄지는 나들목으로 기능이 바뀌었을 뿐 예나 지금이나 부상고개를 넘어야 성주에서 김천으로 갈 수 있다.

◆'조산베기' 돌무더기에 어린 과거 급제의 꿈

안언역이 있던 마을은 안상언(案上彦) 또는 안원이라 부르는데 책상 '안(案)' 선비 '언(彦)'자를 쓰는 것으로 보아 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이 이곳을 지나다 쉬어 가면서 글 풀이를 하던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마을 어귀에는 옛날 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이 고개를 넘으면서 저마다 장원 급제의 소망을 담은 돌을 하나씩 던진 것이 모여 '조산베기'라는 돌무더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 돌이 시험에 영험이 있다고 소문이 나면서 무속인을 비롯해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마다 하나씩 주워가 버려 지금은 본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농현상과 함께 주민 수가 줄어드는 등 마을이 쇠퇴하자 "조산베기 돌무지가 사라지면서 주민들이 마을이 쇠퇴하고 있으니 이를 원상태로 복원한다면 마을의 안녕과 부흥을 이룰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성주를 지키면 국가의 회복을 꾀할 수 있어

성주는 영남우로 간선도로과 낙동강 수로까지 있어 사통팔달 교통 요충지 역할을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적군의 주요 침략로가 될 수 있는 약점을 안고 있다. 고려 말 왜구가 침략했을 때도 성주지역은 많은 피해를 당했고, 이를 방비하기 위해 적지 않은 힘이 투입됐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적의 침공로의 한 가운데 위치한 탓에 왜적에게 읍성을 점령당했다. 이로 인해 영남우로의 성주옛길은 의병들의 활약이 두드러진 전쟁터가 된 것이다.

왜군에 점령당한 성주성을 회복하는 전투에 앞장선 의병장 송암 김면은 '격강좌열읍문(檄江左列邑文)'에서 "성주고을은 적로의 요충지대로서 참으로 성도(成都)의 검각(劍閣)과 같으니 한 도(都)의 웅부로서 어찌 말릉의 형주(荊州)와 다르랴. 곡식은 수년을 지탱할 수 있으니 오창(敖倉)의 군량과 같고 무기는 딴 고을에 비해 갑절이 되는 한(韓)나라의 굳센 노(弩)보다 많다. 사방의 백성들은 모두 도망쳤으나 초(楚)나라의 3호(戶)뿐이 아니고 백성이 함몰되었으니, 아직 즉묵(卽墨)의 만가(萬家)가 있다. 성주를 지키면 국가의 회복을 꾀할 수 있으나 이곳을 잃으면 국가의 대사를 그르칠 것이다."며 당시 전략적인 측면에서 성주의 중요성을 높이 평가하며 이를 회복할 것을 주장했다.

영남우로의 안언역은 성주에 진입하는 요충지다. 왜군에게 점령당한 성주성을 탈환하기 위한 전투에 앞서 안언역 전투가 벌어졌고, 의병들은 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김면, 정인홍 등이 중심이 된 의병들은 영남우로를 보급로로 사용하고 있는 왜군을 차단하기 위해 세 차례 성주성 탈환 전투를 벌여 왜군 스스로 성주성을 포기하고 퇴각하는 전과를 올린 것이다. 현재도 안언역에서 선남면 장학리를 지나 별티고개를 넘다보면 이 전투와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왜군을 무찔러 승리한 마을이라는 의미의 시어리(勝倭里), 왜군을 무찌르고 수비한 곳의 시비실(守備谷), 왜군을 막기 위해 의병들이 산에 막을 치고 지켰던 살망태(산막터), 의병들의 전승지로서 수레(車)가 많이 집결한 차동골 등이 있다.

◆의마(義馬)의 흔적

성주읍에 위치했던 답계역을 지나 한양으로 가기 위해 대야현이라는 작은 고개를 넘어가면 초전면이다.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의 성주읍 지형과 관련해 초전면은 '소 풀을 넉넉히 마련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초전면 소재지는 대매라는 자연부락 이름으로 불린다. 답계역에서 부상고개에 이르는 영남우로와 관련해 의로운 역마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답계역 역졸(驛卒) 김계백이 어느 날 볼일이 있어 자신이 5∼6년을 키워온 역마(驛馬)를 타고 부상참에 갔다 술에 만취해 고개를 넘어 오다 큰 호랑이를 만났다. 놀란 계백이 말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호랑이가 덤벼들어 계백을 물려고 하자, 말이 갈기를 떨치고 길게 울부짖으며 발길질을 하면서 주인을 보호하기 위해 호랑이에게 맞서 싸웠다. 싸우면서 물러서기를 수차례 반복하는 사이 10여리쯤의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객점에 이르러서야 말이 쓰러지면서 죽고 말았다. 훗날 김계백은 자신을 구해준 말의 은혜를 잊지 못해 객점 앞에 죽은 말을 묻고 돌 비석에 '의마총'이라고 새겼다. 그 객점은 대마점(大馬店)이라고 불렀다. 지금 대마점이 있던 그곳은 민가와 경지정리로 잘 정돈된 농경지만 있을 뿐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다만 누군가에 의해 심어졌을 작은 느티나무 한 그루만 쓸쓸히 의마의 흔적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태봉안 행렬이 지나갔을 옛길의 볼거리

영남우로가 지나가는 성주에는 세종대왕자태실이 있다. 세종대왕자태실은 세종대왕의 적서 왕자 가운데 장자 문종을 제외한 나머지 왕자와 손자 단종이 태어났을 때 조성한 태실 등 모두 19기의 태실이 한 곳에 군집을 이루고 있다. 전국 최대 규모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성주에는 이밖에도 태종대왕의 태실과 단종대왕이 세자로 책봉된 후 가야산 법림산으로 이전 조성한 태실 등 두 곳의 태실이 더 있어 생명문화의 산실로 불리고 있다.

성주군은 5월 27일부터 29일까지 3일간 세종대왕자태실에 담겨진 생명문화를 구현하는 생명문화축제를 통해 태봉안 행렬 등 다양한 문화·체험행사를 열었다. 왕실의 번영을 위해 전국 명당을 찾아 태실을 조성했던 조선왕실에서는 왕자'공주가 태어나면 안태사를 파견해 서울에서 태실지까지 태를 운반했다. 태봉안행렬은 왕실을 위한 국가적인 행사로서 의장을 갖춘 수백명이 참여해 수백리길의 태실지까지 이동한다. 이 행렬은 당시 백성들에게 큰 볼거리였으며, 이를 재현한 성주군의 생명문화축제에도 국·내외 수십만명의 관관객이 찾아와 즐겼다. 세종대왕자태실은 부상고개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으며, 태종 태실도 안언역 인근에 위치해 있어 당시 두 태실을 조성하기 위한 태봉안행렬은 모두 영남우로 성주옛길을 통해 이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휘황찬란한 의장을 한 안태사 일행이 문경새재를 넘어 오면 경상도관찰사가 마중했다. 문경, 상주의 역로를 관할하는 유곡도찰방의 안내를 받아 김천도의 역로에 이르면 성주, 김천, 고령, 합천, 거창 등의 21개 역로망을 관할하는 김천도찰방이 마중을 나갔다. 안태사가 부상고개를 넘어 성주목의 경계에 이르면 성주목사가 마중했으며,성주판관이 김천도찰방과 함께 앞장서서 태실지로 이동했으니 엄청나게 불어난 그 행렬은 상상만으로는 짐작조차 되지 않을 만큼 장관이었을 것이다.

성주'정창구기자 jungcg@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