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그 마음을 어찌 다 알까

가을 나들이길 어느 논둑에 하얗게 핀 억새꽃을 보니 언젠가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시가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으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들길까지 내려와서/ 손짓하실까?// 가을 볕살에/ 까매진 얼굴// 하얀 머리수건 쓰고/ 논두렁에 올라서서// 한길 쪽 건너보시는/ 우리 어머니.//'(권영세 시 '가을 억새풀' 전문)

아흔을 넘긴 어머니께서는 시골집에 혼자 계신다. 열여섯 살에 외동아들인 아버지와 결혼하여 딸 하나, 아들 여섯을 낳아 기르셨다. 층층시하에 칠 남매 자식들 키우랴, 농사일 거들랴, 힘들었던 그 세월을 오로지 숙명으로 여기고 오늘까지 살아오셨다. 이제는 가까운 마을회관 가면서도 몇 번이나 쉬셔야 하는 노쇠한 그 모습이 가슴 아프다. 도시에 나와 사는 자식들이 서로 모시려고 해도 기어이 시골집 두고 못 가신다는 어머니의 그 마음을 어찌 다 알까.

어머니는 어릴 적 나의 외조부께서 여자가 글자를 알면 시집가서 친정집에 편지 자주 한다고 학교 공부를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한글을 모르는 문맹자(文盲者)시다. 하지만 요새는 전화기의 단축키 번호 자리를 눈여겨봐 두었다가 자식들 집에 전화를 잘도 거신다. 어느 날,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너는 요새 와 집에 안 오노?" "일이 바빠서 어머니 뵈러 가지 못한다고 어제도 전화를 드렸잖아요." "전화 백번 하면 뭐 하노? 집엘 와야지." 그러고는 이내 전화를 끊으신다. 지난해만 해도 바쁘면 전화라도 자주 하라고 하시던 어머니가 아니었던가.

두 해 전 4월 어느 날, 어머니는 나를 불러 읍내에 있는 미장원에 좀 데려다 달라고 하셨다. 그날 어머니는 수십 년 참빗으로 정성껏 빗어 은비녀 곱게 꽂았던 그 긴 머리를 자르셨다. 가위에 잘린 어머니의 긴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질 때, 그 얼굴에서 지난 세월 쌓였던 만감(萬感)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모습을 나는 보았다. 남자처럼 단정한 하이칼라 머리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께 여쭈었다. "어머니, 이제 머리가 시원해요?" "그래 시원하고말고." 그동안 머리를 감고 빗는 일이 얼마나 귀찮았으면 그 말이 그리도 쉽게 나왔을까. "앞으로도 어머니 머리 자를 때는 꼭 제가 모시고 갈게요." "그래 네가 해라."

어느 날 맏형이 어머니의 머리가 많이 자란 모습을 보고 미장원에 모시고 가려고 했더니, 셋째가 담당이니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고 했다. 그건 어쩌면 여러 자식들을 골고루 보시려고 한 가지씩 다른 일을 맡긴 어머니의 지혜가 아닐까. 늘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나에게는 어머니 당신의 머리 담당을 시키신 것이라 생각하니, 죄스러움이 마음에 가득하다.

권 영 세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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