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드라마나 영화, 문학작품 등 역사를 소재로 한 창작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어려운 한자와 학술용어로 쓰여 일반인이 읽기 어려웠던 역사책을 쉬운 언어로 재미있게 써서 널리 알린 이덕일 같은 인문학자들의 노력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올해 대구시의 '한 도시 한 책'으로 선정된 이영서의 '책과 노니는 집'도 조선 후기를 배경으로 한 역사 동화로, 책방 소년 장이의 눈으로 본 조선시대 풍경과 사람들 이야기다.
'아버지의 꿈은 작은 책방을 꾸리는 것이었다. 아침이면 아버지는 밤새 글씨를 써서 벌게진 눈으로 장이를 향해 웃어 주었다. 그러면 장이는 잠이 덜 깬 눈으로 앉은뱅이 책상 곁에 다가가 아버지 무릎을 베고 누웠다. "간밤에는 무슨 이야기를 쓰셨어요?" 아버지는 손에서 붓을 떼지 않은 채 질문에 답을 해 주었다. "우리에겐 밥이 될 이야기, 누군가에겐 동무가 될 이야기, 그리고 또 나중에 우리 부자에게 손바닥만 한 책방을 열어 줄 이야기를 썼지." 아버지가 장이를 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장이의 아버지는 필사쟁이로 글과 책을 베끼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데, 천주학 책을 베껴 썼다는 이유로 돌연 관아에 끌려간다. 필사쟁이 아버지가 베껴 쓴 것은 천주학 책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책이었고, 그중엔 천주님은 물론 부처님, 공자님 말씀도 수두룩했지만. 아버지는 그 후 시름시름 앓다가 변변히 약도 못 써보고 세상을 떠난다. 어머니 얼굴도 본 적 없는 소년 장이에게 아버지는 세상의 모든 것이었기에 장이는 외톨이가 되고 만다.
혼자 남은 고아 소년 장이를 거두어주는 이는 아버지에게 필사 일거리를 주던 약계책방 최서쾌 어른이다. 장이는 책방 심부름을 하며 책방 단골인 홍교리 등을 만나게 된다. 책이라면 무조건 모으고 읽는 젊은 관리 홍교리의 서재 이름은 '책과 노니는 집'이라는 뜻의 서유당(書遊堂)이다. 약계책방을 찾는 손님들과 홍교리, 서유당에 끌린 장이는 책과 지식의 세계에 점점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홍교리는 영특한 소년 장이에게 책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책은 읽는 재미도 좋지만, 모아 두고 아껴 두는 재미도 그만이다. 재미있다, 유익하다 주변에서 권해 주는 책을 한 권, 두 권 사 모아서 서가에 꽂아 놓으면 드나들 때마다 그 책들이 안부라도 건네는 양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지. 어느 책을 먼저 읽을까 고민하는 것도 설레고, 이 책을 읽으면서도 저 책이 궁금해 자꾸 마음이 그리 가는 것도 난 좋다. 다람쥐가 겨우내 먹을 도토리를 가을부터 준비하듯 나도 책을 차곡차곡 모아놓으면 당장 다 읽을 수는 없어도 겨울 양식이라도 마련해 놓은 양 뿌듯하고 행복하다."
'복숭아꽃 오얏꽃 핀 동산'이라는 뜻의 도리원에서는 '아름다운 피리'라는 이름을 가진 미적 아씨를 만나고, 귀한 남동생 백일상을 차려주기 위해 늙은 노새 한 마리 값도 안 되는 돈에 기생집으로 팔려온 어린 여자아이 낙심이도 만난다. 그 후 장이는 슬프고 아픈 일들을 겪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필사쟁이로 자라난다.
이 책에는 책과 관련된 여러 흥미로운 삽화들이 등장한다. 도리원 마당에서 이야기책을 전문적으로 읽어주는 전기수를 초청하여 이야기를 듣는 장면 같은 것이다. 돈을 받고 책을 빌려 주는 책방인 '세책방'이 성행하여 양반집 부인들이 언문으로 된 이야기책을 빌려보는 재미에 흠뻑 빠졌다는 것도 재미있다. 요즘으로 치면 '금서'에 해당하는 천주학 관련 책을 몰래 구해주거나, 금서를 갖고 있는 것이 발각되어 관원에 끌려가는 장면도 등장한다. 예나 지금이나 책을 둘러싼 풍경이 마냥 평화로울 수만은 없나 보다. 선선한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물드는 아름다운 계절, 대구 시민들이 장이와 함께 조선시대 책방 거리를 거니는 재미를 느껴보면 좋겠다.
수성구립 용학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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