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486세대들에게 1980년대는 최루탄과 화염병으로 상징되는 암울한 시기였다. 하지만 아련한 노스탤지어가 떠오르는 이율배반적인 시기이기도 하다. 최인훈'이장호'배창호'안성기'곽지균이 설정한 영화 장면들에 눈물샘을 자극받았던, '살아남은 자들의 낭만'이 있기 때문이다.
이우석(76) 동아수출공사 회장은 그런 우리 영화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한 명으로 꼽힌다. 그가 제작한 작품 가운데 영화팬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정도의 수작이 많기 때문이다. 1970년대를 대표하는 하이틴 영화 '진짜 진짜 잊지마'(임예진'이덕화), 1980년대 '바람 불어 좋은 날'(안성기'유지인), '만추'(정동환'김혜자), '적도의 꽃'(안성기'장미희), '깊고 푸른 밤'(안성기'장미희), '겨울나그네'(안성기'이미숙), '칠수와 만수'(안성기'박중훈) 등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또 1990년대에 들어서서도 '그들도 우리처럼'(박중훈'문성근), '천국의 계단'(안성기'정보석),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 이응경'김의성) 등 숱한 화제작을 남겼다.
"지금까지 모두 84편의 영화를 제작했는데 100편은 채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쟁과 평화' '늑대와 춤을', '흐르는 강물처럼' '클리프행어', '원초적 본능', '다이하드 3' 등 외화 150여 편을 수입하기도 했지요. 출연작 대부분을 한국에 소개했던 인연으로 홍콩 배우 성룡(成龍)은 아직도 저를 아버지라 부르며 자주 연락합니다. '미워도 다시 한번'을 대만에 수출해 한류 바람을 일으켰던 일도 기억에 남네요."
하지만 그는 그리 큰 돈을 만지지는 못했다고 했다. 돈 버는 대로 영화 제작에 재투자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유신(維新) 이후 영화 제작까지 겸해야 외국영화를 수입할 수 있도록 제도가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영화 수입으로 수익이 나면 제작비에 모두 쏟아넣었죠. 대종상을 휩쓸었던 '깊고 푸른 밤'도 당시로선 파격적이었던 미국 올 로케이션으로 화제가 됐죠. 덕분에 저희 회사는 '감독들이 편하게 일할 수 있는 회사'로 알려져 있기도 하고요. 사실 국내 영화시장이 작아서 영화 10편을 제작해도 3편 성공하기가 힘들어요." 이 회장은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2001년 보관(寶冠) 문화훈장을 수상한 데 이어 지난 7월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했다.
그가 영화사를 만든 것은1967년, 30대 초반 때였다. 혹 서구문화에 일찍 눈뜬 '얼리 어답터'였나 싶었지만 그는 "먹고살기 위해서"였다는 솔직한 답변을 들려줬다. "강제징용에 끌려간 아버지를 따라 3살 때 일본으로 갔다가 해방되면서 귀국했습니다. 어릴 때 '조센징'이란 이유로 일본 애들한테 두들겨 맞은 후유증으로 지금껏 7번이나 코 수술을 받기도 했죠. 우연한 기회에 영화수입회사에 사환으로 취직했다가 평생 영화판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19일 열린 한일 정상회담 소식을 전하는 TV 뉴스에 그의 얼굴이 순간 파르르 떨리는 듯했다.
"17살 때 점쟁이로부터 '투기사업을 할 운명'이란 소리를 들었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는 그는 요즘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고(故) 최동원과 선동열, 두 슈퍼스타의 실화(實話)를 그린 야구 영화 '퍼펙트 게임'이 12월 초순 개봉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는 인기배우 조승우가 최동원으로, 양동근이 선동열로 출연한다.
"1987년 5월 16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두 선수가 벌였던 연장 15회 무승부 완투 대결이 모티브입니다. 생전에 영화화를 기꺼이 허락하고 조언을 아끼지 않은 고인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배우들은 물론 스태프들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촬영을 마치고 후반작업 중인데 각본 없는 드라마라 불리는 스포츠를 통해 우리 인생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성주 초전면이 고향인 그는 조만간 자서전을 통해 영화계 뒷이야기도 소개할 예정이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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