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 살던 고향은] <17>황명자 시인의 영양 영양읍

담뱃잎 찌던 황토굴 숨바꼭질 최고의 은신처 하지만 몸에 배인 그 냄새

경북 영양읍 일월면의 한 황초굴. 어릴 때 고추농사만큼 담배농사를 많이 짓던 당시 담뱃잎을 말리던 황초굴을 귀농한 한 지인이 2층에 발코니가 달린 황토방으로 개조했다. 숨바꼭질 놀이터로, 한겨울 훈훈한 사랑방으로 애용됐던 황초굴이 이젠 하나둘 사라져 사무치게 그립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경북 영양읍 일월면의 한 황초굴. 어릴 때 고추농사만큼 담배농사를 많이 짓던 당시 담뱃잎을 말리던 황초굴을 귀농한 한 지인이 2층에 발코니가 달린 황토방으로 개조했다. 숨바꼭질 놀이터로, 한겨울 훈훈한 사랑방으로 애용됐던 황초굴이 이젠 하나둘 사라져 사무치게 그립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어릴적 정들었던 고향집. 지금은 동네 아주머니가 들어와 사신다. 가을 햇살에 서숙을 말리는 모습이 옛날 그대로다.
어릴적 정들었던 고향집. 지금은 동네 아주머니가 들어와 사신다. 가을 햇살에 서숙을 말리는 모습이 옛날 그대로다.
황명자 (시인)
황명자 (시인)

"오빠야, 이거 방금 눈 거다. 퍼뜩 싸라!"

긴긴 일요일에, 그것도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너무나 심심한 나머지 어린 남매가 짜낸 머리란 게 장에 오가는 사람들 골탕먹이자는 거였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누런 포대 종이에 노끈으로 얌전히 묶어 길 가운데 놓아두면 누구나 선뜻 집어들다가 봉변을 당하곤 했던 그것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이 아니라 우리 집 누렁소가 금방 싸놓은 다름 아닌 쇠똥이었다. 손에 똥칠갑을 한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남매가 배를 잡고 웃던 기억이 사십여 년 지난 지금까지도 아련한 건 고향을 향한 그리움 때문일까? 생생한 기억들은 추억으로 남아 때때로 가슴 뭉클하게 한다.

우리 집은 길집에다 정미소를 했기 때문에 오가는 사람들도 많았고,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곡식을 찧으러 오는 사람들과 장꾼들이 겹쳐 잔칫집이었다. 영해, 창수, 무창, 화천 등지에서 장 보러 오는 사람들이 오리 길 남짓 남은 읍내 장터로 가려면 우리 집은 쉬어가기가 알맞은 거리였던 것이다. 우리 집은 그야말로 참새 방앗간이었다. 그땐 차가 귀했던 때라 다른 면 사람들이 군소재지에 있는 우시장에 소를 팔러 오려면 직접 소를 몰고 걸어와야 했다. 소를 몰고 걸어서 우시장까지 오기엔 하루가 꼬박 걸리는 거리이다 보니 소가 지쳐서 살이 내리는 건 뻔한 이치였다. 당연히 제값을 못 받기 때문에 한 보름 전에 미리 맡겨 두었다가 살이 오르면 장날에 내다 팔 작정인 것이었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 유일하게 외양간이 있어서 미리 소를 맡겼다가 찾아가는 사람들이 한 장마다 꼭 있었다. 그 바람에 어머니는 장 전날 소 주인의 숙식을 제공해 주는 서비스 정신을 발휘하기도 했다. 부모님은 그 값으로 얼마의 대가를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막내오빠 역시 수월찮게 돈을 만졌다는 것을 중학교 들어가서야 알았다. 오빠와 나는 두어 해 가까이 방과 후면 그 소를 몰고 풀을 먹이러 가곤 했는데 나는 순진하게도 이용만 당한 셈이었다. 도망가는 소를 잡으려다 넘어져서 팔꿈치며 무릎이며 성할 날이 없었는데, 그때마다 오빠는 빨리 뛰라고 고래고래 소리만 질러댔으니 오빠는 소리지른 값으로 돈을 벌었고 그 돈은 고작 엿가락을 사먹거나 구슬 사모으는 데 쓰였으리라.

내 고향은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하원1리이다. 다섯 가구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았다. 읍에서 동쪽으로 오 리쯤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에 지금도 정미소가 그대로 있다. 파초가 빈 울타리 밖으로 팔을 뻗고 칸나가 붉디붉은 심장을 내보이며 키재기하듯 서 있는 앞마당은 아담하지만 꼭 필요한 공간이었다. 곡식 타작은 물론 해질 무렵 멍석 하나면 여름 마당은 노천 거실이 되었다. 옹기종기 모여앉아 온가족이 여름밤을 즐기노라면 밤 깊어가는 줄 모를 때가 많았는데, 나는 주로 밤하늘의 별을 보며 외톨이처럼 공상에 젖다가 잠들곤 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집을 기점으로 더 위로는 한내(大川)마을이 강을 끼고 있고 산간지방이라 지명들 또한 달밭골, 지무실, 배바들, 자라목 등 산과 어우러져 부르기도 정겹다. 더 위로 창수령이 있고 넘어가면 영덕군이다. 영해는 영덕군에 속해 있는데 대부분 장날이면 영해에서 넘어오는 생선이나 젓갈류 등이 장터와 시외버스정류장에서 성시를 이루었다. 북쪽으로는 일월산을 기점으로 조지훈 시인의 생가가 있는 주실마을, 반딧불이가 살 정도로 청정한 수비 수하마을이 나온다. 이 일대에 있는 소나무들은 특이하게도 모두 적송들이다. 아마도 봉화 춘양목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동쪽이나 북쪽 모두 바다와 인접해 있어서 해산물이 흔한 곳이 영양이기도 하다. 청량산, 함백산, 태백산 등도 가까워 봄 가을로 등산객들이 영양을 거쳐 가기도 하고, 일월산을 찾는 이들도 더불어 많다. 특히 일월산은 골이 깊어 산나물이 많다. 봄이면 산나물을 뜯기 위해 많은 인파가 몰려든다. 일월산은 무속신앙이 깃든 산이기도 하다. 대전의 계룡산처럼 기도를 하고 가면 영험이 있다고 하여 많은 무속인들이 일월산을 찾는다. 특이하게도 그 주변의 절들은 모두 무속과 관련이 깊다. 일월산 정상에 있는 '황씨 부인당'도 이런 맥락으로 보면 된다.

도시에 나와 살면서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왜냐하면 억센 경상도 북부지방 사투리를 쓰기 때문이다. 삼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고향 사투리를 떠나지 못한 채 만나는 이마다 고향을 묻게 한다. 그런데 처음 대구로 나와서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영양'이라고 하면 "거기가 어디지? 안동은 아는데"라고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그 뒤로는 설명하기가 귀찮아서 그냥 안동 근교라고 대답하기가 쉬웠다. 시인으로 등단하면서 출생지를 영양으로 밝히게 되자, 그동안 잠깐이라도 고향을 꺼려했던 게 쑥스러웠다. 그만큼 영양은 오지였다. 덜컹거리는 길을 빠져나와 안동까지 두 시간, 아스팔트길을 달려 대구까지 두 시간 반을 버스에 시달리고 나면 며칠은 차멀미가 남아 있을 정도였다. 경북의 오지를 꼽으라면 봉화 다음으로 영양이다. 그러던 것이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버스로도 세 시간 미만이고, 승용차로는 두 시간여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가 되었다.

영양은 특산물인 고추가 알려지면서 어느새 명소가 되어갔다. 어느 해던가 친한 문우와 영양을 가는데 천지가 초록으로 출렁이는 고추밭과 담배밭인 걸 보고 깜짝 놀라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담배 농사보다 고추 농사가 주를 이루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담배농사를 짓는 집이 열 집 가운데 아홉이었다. 자라면서 맵고도 알싸한 담뱃잎 내음에 늘 빠져 지냈으니 오죽하랴. 게다가 놀이터가 정해져 있지 않은 시골 아이들의 놀거리란 게 숨바꼭질이었는데, 술래 말고는 담뱃잎을 찌기 위해 지은 황초굴에 숨어들곤 했다. 마치 동굴 같은 황초굴에 숨어들면 술래가 찾아내기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요즘 인터넷이나 신문에서 사라져 가는 시골 풍경으로 황초굴을 보여 주자, 외지인들은 일부러 황초굴이 있는 집을 사서 개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얘길 듣는 순간, 옛집에 있던 황초굴이 생각났고 이미 사라진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옛것에 대한 애착이 생겨났다.

어린 날, 나는 몸도 마음도 시베리아 벌판이었다. 칠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나는 사랑보다는 천덕꾸러기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오빠, 언니들은 제각각 바쁘다는 핑계로 정미소 잔심부름은 내 차지였고,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호롱불 밑에서 지내야 했기에 문화생활은 고작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오빠들 몰래 훔쳐 듣는 게 고작이었다. 간간이 읍에 내려가 군립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봤던 기억은 난다. 그래서 늘 채워지지 않는 욕구를 공상이나 글쓰기에 쏟았다. 초등학교는 멀고도 멀어 겨울이면 칼바람이 쌩쌩 부는 문고개를 넘고 국개들판을 가로질러 가야 하는 게 너무나도 끔찍했다. 그렇듯 나는 늘 마음 한구석이 허기져 있었다. 그토록 마음이 허허로웠던 이유는 벼랑 끝에 선 것 같은 절망감에서 헤어나고 싶은 갈망이 늘 솟구쳤기 때문인 것 같다. 초등학교 때부터 시인이 되고 싶었던 나는 끊임없이 탈출을 꿈꾸었으니. 스무 살이 다 되어서야 문학이라는 거창한 빌미를 내세워 겨우 우물 안을 빠져나와 도시로 무작정 헤엄쳐 나온 올챙이가 될 수 있었던 나는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다.

이제 영양은 문향(文鄕)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좁은 지역에 비해 문학인이 많이 배출되었다는 점을 살려 영양을 문향의 고장으로 이미지화시킨 군 자체의 전략이기도 하다. 시인이나 소설가의 생가를 부각시키고 문학비나 기념관을 건립하여 그들의 문학적 가치를 계승시켜 나가고자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시인 조지훈, 오일도, 소설가 이문열 등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문인들도 여럿 있다. 가을에 조지훈 문학제를 열어 백일장 등 많은 행사를 한 지도 여러 해 되었다. 고려대학교에서는 조지훈 문학상을 만들기도 했다. 지난해부턴가 조지훈의 시 '승무'의 한 구절을 따서 '외씨버선길'도 만들었다. 이 길은 일월 대티골을 시작으로 봉화까지도 갈 수 있는 올레길이다. 영양군은 옛길을 살려 트레킹코스로 활용하여 영양을 바깥으로 홍보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나 역시 회귀를 꿈꾼다. 고향 끝자락에 텃밭이라도 일궈보자는 심산으로 삼십여 년 떠나온 고향을 향해 달음박질치고 있는 중이다. 고향의 뿌리가 나를 지탱해 주었다는 걸 알게 된 지금.

황명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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