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희준의 캐나다 편지] 빨강 머리 앤

이곳 몽튼은 지금 깊은 가을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하다 못해 춥기까지 합니다. 주변의 나뭇가지는 푸른 잎을 떨어내고 노랗게, 빨갛게 타들어 가고 있습니다. 캐나다의 상징인 단풍나무를 주변에서 쉽게 구경할 수 있지만 이렇게 단풍 색깔이 붉게 변할 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지금쯤 한국도 단풍 구경에 한창이겠지요.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올가을에도 주말과 연휴를 이용해 저희 가족은 별다른 준비 없이 차를 타고 길을 나섰습니다.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식구들과 길을 나서면서 대화를 하고 같이 외식하는 기분을 즐깁니다. 한국에서 숙박을 하기가 여의치 않아 새벽 일찍 떠나 밤늦게 돌아오는 일정으로 전국을 누볐던 기억이 납니다. 서울에서 충무까지 당일 여행을 즐길 수 있을 정도로 도로망이 잘 갖추어져 별 어려움 없이 다녀올 수 있었지만 돌아올 때는 막히는 고속도로에서 시간을 허비한 기억이 많습니다.

이곳에서는 한국처럼 고속도로가 막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대신 지루한 장거리 운전에 졸음을 참기 어려운 경우가 생기는 것에 대한 대비와 갑자기 튀어나오는 야생동물을 조심해야 합니다. 야생동물이라고 해서 다람쥐나 너구리 정도를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노루 정도만 해도 부딪힐 경우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는데 캐나다에서는 노루가 아닌, 황소 크기의 무스(Moose)가 튀어나와서 가슴을 철렁하게 합니다. 황소만 한 무스가 갑자기 도로로 뛰어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부딪힐 경우에는 차가 전복되는 큰 사고로 이어집니다.

올해는 가족과 함께 집에서 비교적 가까이 있는 PEI(Prince Edward Island)에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캐번디쉬에 있는 몽고메리의 동화 '빨강 머리 앤(Ann)'을 그대로 구현한 테마공원을 방문했습니다.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된 집과 거리가 인상적인데다 당시의 모습으로 분장한 배우들이 곳곳에서 공연을 하더군요. 하이라이트는 오전 10시부터 시작되는 '빨강 머리 앤' 공연입니다. 공연은 앤이 그린 게이블스 집에 도착하여 매튜와 마릴라, 옆집에 사는 다이애나를 만나는 장면부터 시작합니다.

공연이 시작되면서부터 저의 식구들은 각자 동화책 속의 인물들과 장소를 떠올리며 배우들 뒤를 따라다니며 동화 내용과 비교하기도 하고 배우들과 직접 대화도 해보았습니다. 앤과 다이애나를 만나고 도깨비 숲을 같이 걸어보고 또 앤이 좋아했던 자작나무도 보았습니다. 그 순간 저와 제 아내도 어린 시절로 돌아갔습니다. 공연이 끝나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곳에서 동화책을 다 읽고 다시 공연을 즐기기도 합니다.

둘째 아들은 공연을 보는 내내 "아빠! 도깨비 숲은 무서워." "다이애나는 정말 예뻐!" 이런저런 얘기를 참새처럼 재잘거렸습니다. 마치 동화책 속의 앤이 혼자 중얼거리던 모습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 같았습니다. 오후 해질 무렵에 성인이 되어 돌아온 앤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앤과 다이애나 그리고 길버트 모두 다 함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면서 거리를 행진하는 것으로 공연은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사실 PEI는 화려하거나 큰 볼거리가 있는 곳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자연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데도 전 세계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힘이 참 대단합니다. 그 흔한 상점이나 편의 시설도 거의 없습니다. 입구에 간소한 입간판이나 작은 사무실 하나가 전부입니다. 가끔 국립공원이나 이름난 관광지에 가서도 실망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있습니다. '겨우 이걸 보려고 고생해서 여기까지 왔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자연 그대로 두어서 아무것도 없는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관광지입니다.

한국의 관광지 풍경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탓이겠지요. 그곳에 앉아 쉬면서 책을 보는 외국인을 보면 할 말이 없습니다. 아직까지도 저는 한국 관광지에서 누렸던 것처럼 풍요로운 먹을거리, 화려한 볼거리를 기대하고 있나 봅니다. 캐나다 관광 명소와 한국 관광 명소 중 어느 쪽이 더 좋으냐고 묻는다면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곳에서는 자연의 웅대함이나 거대함을 느낄 수 있다면 한국에서는 작고 섬세한 따뜻함을 느낄 수가 있다고 말입니다.

khj091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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