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은행알 선물

갈색 속껍질이 싸고 있는 땅콩 같은 것이 밥 안에 들어 있다. 갈라진 속껍질 사이로 말랑말랑한 노란 연질의 속살이 보인다. 아내를 쳐다보니 은행알이라고 한다. "당신이 병원에서 가져왔잖아요. 기관지에 좋다고 해서 밥에 넣었어요."

진료를 끝낸 노인이 검은 비닐봉지에 싼 것을 진료실 책상 위에 놓고 갔었다. 간호사가 황급히 따라가서 물으니 은행이라고 말하며 진료실 밖으로 급히 나갔다. "아니, 저 할머니가 어떻게…." 멍하니 할머니를 바라보다가 비닐봉지 안을 들여다보았다. 겉껍질을 깐 은행알들이 소복이 쌓여 있다.

할머니는 파열된 뇌동맥류 수술을 받은 환자다. 뇌출혈을 일으켜 병원에 왔을 때 수술 승낙서에 서명해 줄 보호자가 없었다. 난감했다. 수술은 해야 하고 보호자는 없고.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보호자를 찾았다. 사십대 중반의 남자분이 오셨다. 할머니의 이웃이라고 했다. 그녀가 혼자 사시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자기가 보호자 역할을 해야 하겠다면서 수술 승낙서에 서명을 해주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할머니도 그럭저럭 회복되셨다.

이번에는 돈이 문제가 되었다. 기초생활수급대상이라 돈이 없었다. 이뿐만 아니라 회진할 때마다 "밥맛이 없다. 힘이 없다. 머리가 아프다"에다 심지어는 "살기 싫다"고 하소연까지 하곤 했다. 의사도 웃는 표정을 지어주는 환자가 좋다. 입원할 때부터 애를 먹인 할머니가 아니던가. 밝은 표정을 한 번만 지어주면 미운 감정이라도 좀 사라지겠는데….

할머니는 간신히 퇴원을 했다. 동사무소에서 긴급 구조 의료 보조금을 받고 보호자로 서명했던 분도 얼마간 부담을 하고 의료진도 입원비가 최대한 적게 나오도록 노력을 해서다. 그렇게 퇴원한 할머니인데도 외래진료를 올 적마다 계속 불평을 했다. "왜 이렇게 밥맛이 없느냐"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프냐" 등등.

그러던 할머니가 갑자기 은행알을 선물로 가져오신 것이다. 은행나무 가로수 밑에서 검은 봉지를 들고 노란 은행잎을 이리저리 흩으며 길에 떨어진 은행을 줍던 등 굽은 할머니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은행의 외종피를 발로 으깨면서 은행 특유의 고약한 냄새도 맡았을 것이다. 각질의 껍질인 중종피를 망치나 펜치로 벗겼다면 손가락을 다치는 일도 있었을 것이다.

문득 할머니가 은행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애를 먹이고 불평만 하던 외적 모습은 은행의 구린내 나는 외종피이고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은 각질로 둘러싸인, 먹으면 몸에 도움이 되는 약효를 가진 은행의 속살처럼 보인다.

출근하려고 집을 나설 때 가을 하늘은 쨍 소리 나도록 푸르고 맑았다.

임만빈 계명대 동산의료원 신경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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