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지상 백일장] 내가 서당 가는 이유/ 하루 또 하루/ 스킨다부스

수필- ♥내가 서당 가는 이유

산 너머 서당엘 갑니다. 오늘은 또 얼마나 열띤 토론이 벌어질지 기대하는 마음이 큽니다.

서당 가는 길에 한눈을 파는 일이 많습니다. 소나무 등걸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의 붉은 이파리에서 가을을 발견한 것처럼 호들갑을 뜹니다.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한 장 찍습니다. 옆에 피어 있는 개쑥부쟁이에게도 잠깐의 눈길을 줍니다. 늦둥이 옹굿나물도 피어 있습니다. 올해는 뭐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들꽃들에게 눈길을 제대로 맞춰주지 못했기에 엄청 반가운 마음에 한참을 노닥거립니다.

꽃들과 한참을 노닥거리며 산길을 넘어 가노라니 함께 공부하는 어르신 한 분이 양지 바른 무덤가에서 맨손 체조를 하고 계십니다. 나는 꽃 보느라 노닥거리고, 그 어르신은 체조하느라 늦습니다. 서당 학생들은 대부분 고희를 넘기신 분들이니 재너머 서당을 오가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운동이 됩니다. 조금 더 하고 오시겠다기에 지나쳐 혼자 갑니다.

서당에 도착하니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합니다. 어느 음악이 선비들의 한시 읽는 소리에 비할까 싶습니다. 어느 봄날 들꽃 사진을 찍으러 그 근처를 서성이다가 이 글 읽는 소리에 반해서 나도 모르게 서당 안으로 들어가서 몰래 듣다가 함께 공부해도 좋다는 허락을 얻었습니다. 학생들이 하나 둘 모여듭니다. 차를 한 잔씩 하고 난 뒤 본격적인 한시 공부를 합니다. 글자 한 자의 해석을 두고 열띤 토론이 벌어집니다.

오늘은 이태백의 시에서 나온 '覺'자입니다. 이것을 두고 '각'으로 읽으면 안 되고 '교'로 읽어야 한다,'각'으로 읽으나' 교'로 읽으나 그 뜻은 비슷하다. 이때 팔순의 노인들의 음성은 어느 청년들 못지않게 크고 우렁찹니다. 이렇게 치열하게 싸우던 싸움이 끝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소화 선생님은 '敎'로 읽으라고 했네, 여기 적혀 있네."바로 이 한마디입니다. 소화 선생님은 지금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는 분들의 훈장 선생님이셨던 분이십니다. 20년 전 이곳 모명재에서 서당을 열고 학생들을 가르쳤던 분이십니다. 작고한 스승님의 함자 앞에서 옛 제자들은 그만 꼬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 어떤 주석이나 해석보다 옛 스승님의 말씀이 제일 권위를 갖습니다. 공부하는 시의 내용도 좋지만 이런 수업 분위기가 정말 좋습니다. 돌아가신 스승님의 흔적 하나에 열띤 토론의 끝을 보는 것, 이런 풍경은 이곳 서당이 아니면 보기 어려운 풍경이니까요.

모든 것은 빠르게 변합니다. 텔레비전의 광고에서도 연일 빠른 것이 제일인 양 광고를 해댑니다. 그러나 여기 이곳의 서당의 시간은 천천히 흐릅니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적 삶을 살 수 있는 곳입니다. 내가 재너머 서당을 다니는 이유입니다.

정경준(대구 수성구 만촌1동)

시- ♥하루 또 하루

달빛이 자장가 불러주면 잠이 들고

참새 먼저 일어나 창가에 앉아 깨워주면

동쪽 창이 환히 열리는 아침.

농부의 하루를 잠들게 하고

깨워주는 것은 바람과 시냇물과 맑은 하늘

그리고 대자연이다.

일찍 찾아온 10월 첫새벽 서리에 시린 어깨 감싸고 밭두렁에 올라서면

훑다 만 고추 잎 서리 맞아 울고 김장배추 오돌 오돌 떨고 있어

볏짚 덮어주고 돌아오는 길.

대밭 속에서 고개 밀고 나오는 햇살에

찬 서리 화들짝 놀라 달아나고

온 밤 내 울던 먹을거리 식물들 눈물 닦아 내기 바쁘다.

하루 또 하루 같은 하늘아래

어제와 같은 하루인 것처럼 날이 밝았어도

분명, 어제와 다른 오늘이다.

박순원 (청도군 운문면 대천리)

시- ♥스킨다부스

거실 한쪽 구석에 이십 년쯤 된

풀 한포기 아무런 표정 없이 살고 있다.

하얗던 화분은 오래된 우리 집 벽지처럼 색이 바랬고,

흙은 말라붙어 딱딱한 서방님 발뒤꿈치 같네.

잎은 가늘어져 내 머리카락 같고,

잘려 나간 너의 몸은 날려 보낸 나의 꿈과 닮았다.

한때는 너도 온 집안을 휘휘 감으며

파란 청춘 뽐내던 시절 있었는데….

몸이 일제히 창밖으로 향한 걸 보니,

나처럼 일탈을 꿈꾸고 있나 보구나.

최순단(대구 수성구 만촌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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