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우리 이야기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푹 빠져 있는 두 남자가 있습니다. 다름 아닌 아들 녀석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좀 이상한 사랑입니다. 어느 날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내게 둘째 녀석이 기웃 거리다 말을 건넵니다. "엄마 우리 이야기도 써 주세요." "우리 이야기? 그게 뭐야?" "그럴 줄 알았어요." 그렇게 허탈하게 말하고 사라집니다. 미안한 마음에 다시 따라 다니며 물어 보아도 대답 대신 그만 되었다는 표정을 보여줍니다.

그 아이가 나 자신보다 소중한 사람임을 의심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자식들이 원한다면 무엇이든 해줄 준비가 되어있다고 믿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의 이야기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사실은 별 관심조차 없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침이면 깨워서 학교에 보내고 돌아오면 간식을 챙깁니다. 숙제는 했느냐고 다그치고 서둘러 학원에 보냅니다. 밤늦게 지쳐서 돌아와도 쉬라는 말은 아껴둡니다. 한 번씩 친구의 아들 이야기로 위장된 압박을 가하기도 합니다. 이게 다 그들을 위한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기도 했습니다.

말로는 너희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고 하지만 언제나 결정은 부모의 뜻이었던 것 같습니다. 엄마가 만들어 주고 싶은 왜곡된 사랑만 있었습니다. 오늘 그들의 소망은 중요하지 않았고 부모로서 바라는 미래만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아들들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내가 원하는 그들로 빚어내고 싶었습니다.

우리 이야기를 알기나 하느냐는 눈빛을 남기고 돌아선 그 애의 서운했던 속마음을 이제라도 읽어 낼 수 있을는지요.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니기를 바라봅니다. 욕심을 포장한 모정이 아니라 자식에 대해 알고 싶어서 골몰하는 사랑으로 바꿔가고 싶습니다.

첫사랑에 빠졌을 때를 떠올려봅니다. 그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미래를 갖고 싶어 하는지 너무도 궁금했습니다. 그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의 관심사에 온 신경을 모았습니다. 그 사람의 이상형에 가까워지려고 안팎을 단장했습니다. 손을 잡고 발걸음을 맞추려고 보이지 않는 사이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지나가버린 첫사랑과는 견줄 수도 없는 나의 분신인데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은 어이없는 어미입니다. 아이들의 더 나은 내일이라는 이름으로 서글픈 현재를 안겨주는 어리석은 어미입니다.

세상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 이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변명하지는 못하겠습니다. 벌써 우리 눈앞에는 겨루어서 승리한 사람보다 따뜻한 인간애로 감동을 선사한 선진들이 많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눈 먼 사랑에서 벗어나 소통하는 관계로 한걸음 더 나아가 보려고 합니다. 다행입니다. 아직은 아이들과 함께할 날이 남아있고, 이제라도 아들 녀석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지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이미영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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