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9'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학교와 집을 오가는 생활도 끝이 보인다. 하지만 달력에서 하루하루 날짜를 지워갈수록 수험생들의 마음은 점점 더 초조하고 불안해진다. 시험 결과에 따라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 지친 어깨를 더욱 짓누른다.
제법 차가운 가을바람이 불면서 멀게만 느껴지던 수능시험일도 일주일 남짓 남았다. 수능시험을 코앞에 둔 수험생들은 지금 무슨 고민을 하고 있으며 그동안 해왔던 공부는 어떻게 마무리 짓고 있을까. 수험생들을 만나 그들의 고민을 들어봤다.
◆'쉬워도 걱정, 어려워도 걱정', 수능 앞둔 고3 교실
지난달 26일 찾은 대구 수성구 대륜고. 오후 2시 30분 자연계열인 3학년 8반 교실에는 침묵이 흘렀다. 학습 진도는 이미 모두 마친 터여서 구자용(수학) 교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자습을 하는 중이었다. 책장을 넘기고 글씨 쓰는 소리 외엔 쥐죽은 듯 고요했다. 복도 반대편 창가 한쪽에 줄지어 가득 쌓여 있는 책과 노트, 칠판 한쪽에는 분필로 'D-15'라고 적힌 글씨가 더욱 분위기를 무겁게 했다.
P군은 쏜살같이 지나가버린 시간이 아쉽다고 했다. 심야 자율학습까지 마치면 오후 11시 30분이 돼서야 교문을 나서지만 여전히 학습량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반팔 교복을 입고 다닌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긴팔을 입게 됐네요. 잘 때마다 후회가 듭니다. '조금만 더 열심히 할걸' 하고요." P군의 성적은 모의고사 평균 2등급에 내신은 백분위 상위 70% 정도. 수시모집에선 상향 지원을 택했다. 고려대, 한양대, 성균관대 공대에 원서를 넣었다. "모의고사 성적만 따지면 수능 최저학력기준에 조금 못 미치지만, 수능시험이 쉽게 출제된다니 기대를 걸어봐야죠. 가장 약한 언어영역을 중심으로 기출 문제를 하루 2회씩 풀어보고 있어요."
같은 반 L군(모의고사 성적 평균 5등급 내외, 내신성적 약 30%)은 큰 욕심을 내지 않는다. 상위권 학생들과 달리 조금만 공부해도 성적이 오를 여지가 있다는 생각에 마음을 편히 먹으려고 애쓰고 있다. "부모님께 죄송하단 생각이 많이 들죠. 그래도 마냥 후회만 하고 있을 순 없잖아요. 수학을 중심으로 기본 개념을 충실히 익히는 데 시간을 많이 투자하고 있어요."
인문계열인 K군은 수능시험을 앞두고 긴장감이 더하다. 내신성적(90%)에 비해 모의고사 성적(1등급)이 좋아 수능시험을 잘 치러 정시모집을 노린다는 전략을 세웠기 때문이다. 수능시험이 쉬워지면 변별력이 떨어지고 실수 한두 개에 당락이 좌우될 수 있다는 생각에 걱정이 앞선다. "감기 기운이 있는데다 요새는 소화도 잘 안 됩니다. 부모님은 재수해도 괜찮다며 부담 갖지 말라고 하시지만 그게 쉽지 않네요."
고3를 마주하는 곽병권 진학부장의 마음도 편치 않다. "요즘 아이들은 겉으론 강해 보이지만 속은 예전 아이들보다 나약한 것 같아요. 상담을 하다 보면 성적이 안 오른다며 우는 학생도 여럿이죠. 그래도 우리가 대신 공부해줄 순 없잖아요. '할 수 있다'며 다독이는 게 전부죠."
같은 날 수성구 정화여고 강당에선 신나는 댄스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정화중과 정화여고가 함께 마련한 정화종합예술제가 열리고 있었던 것. 친구들의 끼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학생들이 내지르는 환호성은 강당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3학년 교실 주변 분위기는 정반대. 차분한 가운데 긴장감이 교실을 메우고 있었다.
"축제요? 그런 건 잊은 지 오래됐죠. 시험 준비하기에도 마음이 바빠요. 아직 다 못 본 외국어영역의 EBS 연계교재를 얼른 챙겨야 하거든요." K양은 수능시험을 앞두고 체력이 떨어져 고민이라고 했다. 쉽게 피곤해지고 아침에 눈을 뜨기도 어렵다. 감기 등 잔병치레가 잦아 고생하고 있다.
모의고사 성적 1등급, 내신성적이 96% 정도인 J양의 목표는 의예과 진학. 최근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은 수능시험 난이도라고 했다. "모의평가를 거치며 수능시험이 쉽게 출제될 거라는 분석이 나오면서 재수생과 반수생이 늘어났잖아요. 고3들에겐 반가운 소식이 아니죠. 시험을 칠 때 실수할까봐 많이 떨릴 것 같아요."
이곳 이인우 교무부장은 시기가 시기인 만큼 예민한 여학생들을 추스르기가 쉽잖다고 얘기했다. "시험이 며칠 남지 않은데다 체력이 떨어질 때여서 다들 힘들 겁니다. 학생들이 찾아오면 수리영역이 쉽게 출제될 것으로 보이니 여학생, 중위권에게 유리할 것이라며 달래주고 있어요."
27일 가본 달서구 대건고. 이곳 고3 교실 분위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활기에 넘치는 1, 2학년생들과 달리 교실 속 3학년들의 얼굴에선 피곤함이 묻어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잠을 쫓기가 점점 힘들어지니 다들 초조해합니다. 가뜩이나 학습량도 부족한데…." 모의고사 성적 3등급, 내신성적이 80% 내외인 K군은 이른바 '인(IN) 서울'이 목표. 하지만 마음이 급한 데 비해 몸이 잘 따라주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물수능'이 되면 중상위권인 제게 불리할 게 없죠. 수능 대박도 노려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운이 따르려면 실력이 뒷받침돼야 하잖아요. 피곤해서인지 책을 들여다봐도 집중이 잘 안 돼요."
Y군의 성적은 모의고사 1등급, 내신성적 97% 정도로 최상위권. 시험 당일 좋은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을지가 Y군의 걱정거리다. "이번 시험에선 실수에 따라 최상위권 학생들의 희비가 엇갈릴 것 같아요. 여태까지 잘해 왔어도 실전에서 헛발을 디디면 소용이 없죠. 제발 시험 당일 긴장하지 않아야 할 텐데…."
◆재수생들도 초긴장
수능을 한번 치러본 재수생들도 초긴장 상태다. 26일 오후 찾아간 대구 송원학원 2층 자습실에는 빈자리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책상마다 높게 쌓아올려진 수험서 사이로 학생들의 피곤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쉬운 수능이 예고되면서 특히 최상위권 재수생들의 긴장감이 가장 심했다.
지난해 수도권 의대에 지원했다가 근소한 차로 고배를 마신 A군은 올해도 의대 진학을 목표로 재수에 뛰어들었다. A군은 "본 수능에서 1, 2문제만 더 틀려도 의대에 갈 수가 없다"며 "쉬운 수능 때문에 절대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는 부담감이 너무 크다"고 말했다.
반면 상위권이나 중위권 학생들은 쉬운 수능으로 부담감이 덜한 표정이다. 일단 점수가 잘 나오면 최상위권, 또는 상위권과의 격차가 그만큼 줄어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목고 출신의 이과 상위권인 B양은 "지난해 언어영역에서 점수가 나오지 않아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는데, 올해는 모의평가에서 언어영역이 지난해에 비해 다소 쉽게 나오는 추세라 다소 안심이 된다"고 말했다. 중위권 수험생인 C군도 "올해는 EBS 교재'강의에서 출제가 많이 된다고 하니 마지막까지 EBS 교재로 총정리를 할 것"이라고 했다.
대구송원학원 차상로 진학실장은 "쉬운 수능이 예고되면서 일부 대학에선 동점자 순위를 어떻게 매길지 벌써부터 고민 중"이라며 "수험생들이 느끼는 부담이 전년보다는 덜한 것처럼 보이지만, 쉬운 수능을 마주하는 학생들의 표정은 엇갈리고 있다"고 말했다.
최병고기자 cbg@msnet.co.kr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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