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이제 너는 차를 몰고 달려가는구나./ 철따라 달라지는 가로수를 보지 못하고/ 길가의 과일 장수나 생선 장수를 보지 못하고/ 교통순경과 신호들을 살피면서/ 앞만 보고 달려가는구나./ 너의 눈은 빨라지고/ 너의 마음은 더욱 바빠졌다./ 앞으로 기름 값이 또 오르고/ 매연이 눈앞을 가려도/ 너는 차를 두고/ 걸어 다니려 하지 않을 테지./ 걷거나 뛰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남들이 보내는 젊은 나이를 너는/ 시속 80㎞ 이상으로 지나가고 있구나./ 네가 차를 몰고 달려가는 것을 보면/ 너무 가볍게 멀어지는 것 같아/ 나의 마음이 무거워진다.'
김광규 시인의 시 '젊은 손수운전자에게'입니다. 시인이 안타까워하는 것은, 이 세상을 너무 가볍게 스쳐지나가는 운전자의 삶의 속도이지요. 철 따라 변하는 가로수와 함께 걸어볼 생각도 없이, 교통순경의 눈치와 신호등의 깜박임을 재빠르게 훔쳐보며 남보다 앞서 달려가려는 운전자들. 이들이 바로 속도의 시대를 사는 우리의 자화상이 아닐까요?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속도에 중독된 사람들은 물건과의 만남부터 변태적입니다. 사람이 물건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물건 그 자체의 독자성 또는 타자성을 유지하지 않고는 물건과의 만남이 충분히 행복해질 수 없으며, 물건 또한 사람의 참다운 욕구와 참다운 삶의 필요에 기여함으로써 사람의 행복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과 물건과의 정다운 관계가 무너진다는 것이지요. 아파트단지 뒷마당에 버려지는 많은 물건들, 멀쩡한 냉장고, 흠집이 별로 없는 장롱, 한때는 가족들에게 포근함을 선사했던 안락의자, 밑창이 닳지 않은 구두, 한철 유행은 지났지만 새것 같은 옷가지…. 한때는 사람의 소유의 폭력적 의지에 의해 비싼 값으로 구매되어 쓰이던 물건일지라도 용도의 종말이 아니라 호불호의 마음에 의해 가차 없이 버려집니다. 어느 날 갑자기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처럼. 그리고 그 물건들은 본래의 기능과는 전혀 상관없이 처량하게 허물어져 갑니다.
이러한 사람과 물건 사이의 도덕적 타락 현상은, 사람에게 소유의 갈증을 끝없이 부채질하는 병리 현상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근원적으로는 사람이 이 세상에 내려야 하는 삶의 뿌리를 병들게 하여 물건과 함께 이루어야 할 공동체적 세계를 파괴하는 원인이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물건을 함부로 버리거나 써 없애는 짓거리를 살물죄(殺物罪)라 명명하고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연을 만나는 방식 또한 표피적입니다. 모처럼 시간을 내어 자연을 찾아 떠나도 먹고, 마시고, 뛰고, 씻고, 찍고, 버리고 되돌아올 뿐입니다. 몇백 리를 달려 바닷가에 도착하자마자 작은 느낌표 하나로 구경을 끝내고 아무 곳에서나 고스톱판을 벌이며 음담패설을 안주 삼아 술잔치를 벌입니다. 아무도 바다의 말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갈매기 날개에 묻은 석양을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모래밭에 흩어져 있는 조개껍질들의 사연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산을 찾아가도 경건한 마음으로 산문(山門)을 열고 들어가 산을 만나려 하지 않습니다. 입구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라도 그들의 이름을 진정으로 불러주는 일이 드물지요. 풍경을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오른 사람들의 발자국을 따라 오르막을 오르는 노동을 할 뿐입니다. 이처럼 마음을 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산이 그 한없이 깊은 가슴을 열어 보일 리가 없습니다. 바다가 설레는 파도의 이야기를 들려줄 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낯선 곳을 다녀와도 아름다운 풍경의 뭉클한 체험은 쌓이지 않고 내비게이션 시스템이 일러준 약도만 머릿속에 어지럽게 남을 뿐입니다.
속도에 쫓긴 이러한 만남들은 진정한 만남이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의 첫인상만 읽다가 시간에 쫓겨 재빨리 돌아서는 접촉일 뿐이지요. 상대방의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가 아픈 곳을 어루만져주고 슬픔을 함께하려는 만남이 아니지요. 내력이 쌓이지 않는 만남입니다. 만남이 아니라 스쳐 지나감이지요. 이 스쳐 지나감이야말로 이 시대 가난의 이유이며 불행의 뿌리가 아닐까요?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반칠환 시인의 '새해 첫 기적'이라는 짧은 시입니다. 이 엄청난 속도와 경쟁의 시대에 바위처럼 가지 않으면서 가고, 하지 않으면서 하는 삶의 항심(恒心)과 근기(根氣), 그리고 자족으로 충만한 바위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제 우리도 가속페달에 얹은 발을 잠시 떼고 이런 속담 한 구절이라도 되새겨봐야 하지 않을까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고, 나는 놈 위에 기는 도사님 계시다.'
김동국/시인·대구두산초등학교장
댓글 많은 뉴스
구미 '탄반 집회' 뜨거운 열기…전한길 "민주당, 삼족 멸할 범죄 저질러"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
尹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 임박…여의도 가득 메운 '탄핵 반대' 목소리
尹 대통령 탄핵재판 핵심축 무너져…탄핵 각하 주장 설득력 얻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