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학교서 논술 톺아보기] '도로 눈을 감아라. 그러면 집을 찾아갈 것이다'

'도로 눈을 감아라. 그러면 집을 찾아갈 것이다.'

논술을 가르치면서 연암 박지원의 이 글을 자주 인용한다. 소경이 길을 나섰다. 늘상 다니던 길이었는데 갑자기 눈이 보이게 되었다. 눈을 뜬 소경은 자신 앞에 펼쳐진 현상들 앞에서 다시 소경 신세가 되고 말았다. 여태껏 안다고 믿었던 인식 세계는 더 이상 의지할 수 없는 헛것이 되고 말았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을 알게 되리라고 생각하였던 소망이 물거품이 되고 다시 알 수 없는 세상에 던져진 것이다. 글쓰기는 그러한 것이다. 아는 것만큼 모르는 부분이 생기는 것이 글쓰기다.

'눈을 도로 감으라, 그러면 너의 집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역설적 표현을 통해 연암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눈으로 확인하는 현실이라는 것이 사실은 허위와 왜곡으로 가득 차 있어 정작 눈에 의지해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던 것조차 제대로 알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즉 누구나 진실이라고 여기는 현실이 허위일 수 있음을 비유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눈을 뜨고 있어도 보고 싶은 것만 보기보다 차라리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길을 찾을 때 바른길이 보인다는 것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을까. 우리는 누구나 까마귀가 검다고 인식한다. 학이 외다리로 서 있는 모습을 보면 위태로움을 느낀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까마귀는 각도와 빛에 따라 같은 검은색일지라도 수시로 색깔이 변한다. 학의 모습이 위태로운 것은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이 그럴 뿐, 학은 그 상태가 가장 편안한 자세인지도 모른다.

무엇이 진리인가? 절대적 인식이라는 것이 과연 있는가? 진리는 가변적이다. 진리 자체는 순간에 따라 충분히 변할 소지를 안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미리 그렇다고 결정한다. 눈으로 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느끼며 고정된 눈을 비우고 마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진정한 인식의 장이 열릴 것인 바, 차라리 앞을 볼 수 없는 소경이 사물을 옳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는 역설이 성립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조차 뒤집어 볼 수는 없을까? 올바르게 인식한다는 것도 또한 부분적 진실에 그치고 마는 것은 아닐까? 그것에 대해 깨닫는 게 연암의 궁극적인 바람이 아닐까?

다시 소경의 이야기로 되돌아가자. 분명 소경은 눈을 감고 자신의 집을 찾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삶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소경이 다시 눈을 감고 갔다면 집에는 도착했을지 몰라도 새롭게 펼쳐진 또 다른 세상은 못 보게 된다.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지라도 하늘과 땅, 새와 나무, 꽃과 그늘을 볼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행복일 수도 있지 않은가.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 어쩌면 늘 보았지만 새롭게 보이는 것들, 늘 보아왔어도 잘못 보아온 것들, 이 모든 것들을 다시 다르게 본다는 것 자체가 유의미한 것이 아닌가.

세상은 이러하다.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유일한 진실은 변한다는 사실뿐이다. 변하는 세상에 변하는 마음조차 겹치니 글쓰기는 더욱 어렵다. 여기에서 우리는 현재 시행되고 있는 논술고사의 한계를 만난다. 세상의 다양한 양상을 파악하고 거기에 자신만의 안목을 드러내는 것이 이른바 논술의 본질이다. 현재 시행되는 논술고사가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는 고개가 저절로 갸우뚱해진다. 이 부분이 제법 오랜 시간 동안 논술에 애정을 가졌던 현재 내 마음의 풍경이다.

한준희 대구통합교과논술지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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