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행복을 찾아서] 44.행복한 삶, 그리고 죽음(3)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헤아리며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될까 한 명의 환자에게

누나의 등에 업힌 동생의 표정이 무척 재미있습니다. 동생은
누나의 등에 업힌 동생의 표정이 무척 재미있습니다. 동생은 '이 옥수수는 내꺼야. 이리 내'라고 말하는 듯 합니다. 힘들게 업어주는 수고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제 먹을 것만 챙깁니다. 비단 누나와 동생 사이의 관계만은 아닐 것입니다.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면서 키워주신 부모님에게 우리는 '더 내놓으라'고만 할 뿐 제 손에 쥔 것을 기꺼이 건네준 적이 없습니다. 누나의 표정은 어떻습니까? 등에 업힌 동생이 무겁고 귀찮기는커녕 그저 예뻐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입니다. 일방적으로 주고받는 관계 속에도 이렇듯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는 우리 스스로가 바로 문제입니다. 사진=이태영(제36회 매일 전국어린이사진공모전 금상) 글=김수용기자
행복은
행복은 '칠흑 같은 밤'이다. 흔히 밝음은 좋은 것이고, 어둠은 암울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밤은 어두울수록 좋은 것 같다. 칠흑 같은 밤-요즘 이 단어의 의미를 느껴 볼 기회가 거의 없다. 밤새 차들과 가로등, 상점의 네온사인들이 거리를 밝히고, 내가 잠든 창문 밖에서 항상 기웃거린다. 칠흑 같은 밤은 이제 아주 깊은 산 속에 가거나, 온 방을 커튼으로 꼭꼭 감싸지 않으면 찾아보기 어렵다. 불면증이 있는 내게 있어 고단한 몸을 온전히 맡길 수 칠흑 같은 밤은 달콤하고 행복한 꿈나라로의 티켓이다. 글/일러스트=고민석 komindol@msnet.co.kr

옛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고 했다. 과학이 그렇지 않다고 소리친 탓에 이제 밤하늘의 별은 그저 별이 됐다. 그래도 까만 밤하늘의 반짝거리는 별을 보고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떠난 사람이겠거니 여기면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우리에게 삶과 죽음 사이에 희미한 별빛이라도 남겨졌다고 하면 그것이 설령 사실이 아닌 환상일지라도 작은 위로가 된다.

어떤 사람들은 호스피스병동을 죽어가는 사람이 입원하는 곳이고, 그곳에 가면 죽는다고 수군거린다. 한 방문객은 "어차피 죽을 사람인데 대충 얼마 남았겠소? 그런 일만 하는 분이니 잘 알 것 아닙니까?"라고 거친 말을 내뱉었다.

이곳은 환자의 '죽음'이 아닌 조금 남은 뜨거운 '삶'을 돌보는 곳이다. 떠나서 영영 돌아오지 못할 이들에게 어떤 삶을 살았든지 세상은 참 아름다운 곳이었음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 때로는 고귀한 일을 한다며 과분한 칭찬을 쏟아내기도 하고, 때로는 죽이는 의사라고 무시하기도 한다. 이처럼 극과 극의 반응이 있어도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할 따름이다.

어느 날 자정쯤 간호사가 다급한 목소리로 응급 전화를 걸어왔다. "과장님, 문정호(가명)님이 진통제고 뭐고 아무 주사도 안 맞겠대요. 여기 있으니까 더 빨리 죽을 것 같다면서 지금 당장 퇴원하겠대요. 부인도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어떡하죠?"

"내일 날이 밝으면 퇴원시켜 드린다고 하고 좀 달래세요." 잠결에 전화를 받고는 환자가 어쩐지 얄미워졌다. 벌써 몇 번째인가. 그는 50대 중반의 말기 췌장암 환자다. 스티브 잡스가 앓은 췌장암에 걸렸고, 수술도 받았다. 하지만 문제는 췌장암보다 간으로 전이된 암 덩어리가 농양(고름주머니)을 만든 것이다. 농양이 어떤 항생제에도 반응하지 않아서 피부 밖으로 배출해내는 시술을 받았다. 하루에도 몇 차례 고열에 시달리면서 통증도 심했다. 그런 상태에서 호스피스병동으로 왔다.

병동에 입원한 지 한 달이 지나도록 잘 버티고 있었다. 가끔 열이 났지만 급하게 나빠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입원 당시 왼쪽 옆구리에 묵직한 통증으로 시달렸다. 아픈 것만 없애주면 오늘 죽어도 괜찮다고 하소연을 했다. 하지만 통증이 조절되고 열도 좀 잡히니까 죽어가는 호스피스병동이 원망스러워진 것이다. 인간적인 심한 배신감에 화가 슬슬 밀려왔다.

그런 전화를 받고 잠든 탓인지 내가 말기암으로 병동에 누워 있는 꿈을 꾸었다.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딸아이가 혼자 남겨질 슬픔만 떠올랐다.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가위에 눌려 끔찍한 공포와 두려움에 시달렸다.

악몽에서 깬 이튿날 아침 출근길에 문정호님을 더 열심히 사랑할 수 있도록 기도했다. 그가 편해질 때까지 하염없이 위로해주는 것이 아직은 건강한 내 몫임을 깨달았다. 매일 성지(聖地)로 가듯 거룩한 마음으로 호스피스병동에 출근한다.

강요하지 않아도 그곳에선 사랑과 화해가 저절로 이뤄진다. 환자와 보호자, 봉사자를 보며 너무도 많은 것을 배운다. 살아있는 성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물론 때로는 안타깝게 삶이 꼬인 채 마무리되는 모습도 보게 된다.

하지만 그런 일도 있기에 더 인간적이다. 살다가 살다가 해결하고 싶어도 해결이 안 되고, 아무리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가 안 되는 사연이 있어 그래서 가끔 오늘이 마지막이었으면 하는 극단적인 생각이 든다면 호스피스병동을 찾아라.

익숙하지 못한 우리의 마지막 모습, '죽음'은 갈등에 대한 정답을 갖고 있다. 스러질 듯 가련한 꽃송이 같은 환자는 좋으면 좋은 대로, 힘들면 힘든 대로 감동을 준다. '죽어가는 환자들이 속삭여주는 살아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아직 사는 것 서툴 듯 죽음을 돌보는 것도 서툴기만 하다. 그래도 우리를 성숙하게 만들어 주는 이 죽음의 병동이 좋다. 반짝이는 밤하늘의 별을 하나하나 헤아리듯, 한 명 한 명의 환자에게 마지막으로 만나는 따뜻한 의사이고 싶다.

글=김여환 대구의료원 호스피스'완화의료 센터장

정리=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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