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재박의 작명탐구] 산악인 박영석 대장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지난달 20일 텔레비전에서 정말로 듣고 싶지 않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 새로운 코리안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떠났던 산악인 박영석 대장이 지난달 18일 오후 4시에 실종됐다는 보도다. 그 소식이 오보(誤報)이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자신의 힘으로 후대 산악인들이 도전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여 세계 산악계에 '코리안 루트'를 남기고 싶었던 박영석 대장. 또한 산악인으로서는 마지막 등반을 눈앞에 둔 그였기에 그의 실종 소식이 더욱 안타까웠다. 그리고 지난달 29일, 그를 찾기 위한 수색작업은 결국 중단되고 말았다. 노련한 구조대와 셰르파들이 대거 투입되었지만, 히말라야의 여신은 그를 내어주지 않았다.

이번에 그의 실종소식을 다루면서 어느 보도에서나 빠지지 않는 말이 있었다. '산악그랜드슬램', 이는 한 산악인이 세계 8,000m급 14좌와 7대륙 최고봉, 그리고 세계 3극점을 모두 등반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산악인들에게는 전설과도 같은 최고의 기록이다. 이 중 어느 하나만 달성하는 것도 어려운데, 세 가지를 모두 달성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인류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 되는 것이다. 그 누구도 이뤄내지 못할 것 같았던 이 업적의 영광을 세계 최초로 누렸던 단 한 사람, 그가 바로 박영석 대장이었다.

이처럼 도전과 탐험으로 점철된, 불꽃과도 같은 삶을 살았던 산악인 박영석. 그는 히말라야의 품에 영원히 안겼지만, '단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그의 굳은 신념과 도전정신 그리고 산에 대한 남다른 애착은 산악인들에게 위대한 유산으로 기억될 것이다.

박영석(朴英碩)은 1963년 11월 2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1980년 마나슬루 원정에 성공해 시청 앞에서 카퍼레이드를 벌이는 동국대산악회 원정대를 보고 산악인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1983년 동국대 체육교육학과에 입학해 산악부에 들어간 그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 산 능선을 오르내리며 힘든 동계훈련도 잘 견뎌냈다.

이렇게 산악인의 길에 들어선 그는 고산등반에 눈을 돌려 '신들의 영역'이라는 히말라야 설산에 발을 들여놓는다. 그 후 8년 만에 산악인의 공동묘지라는 악명을 지닌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의 대업을 완수한다.

그가 산악인이 된 데에는 도전적이고 활동적인 성격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이름이 가진 성격을 보면 토(土)와 금(金)의 기운이 강하며, 사주상에는 재성(財星)과 상관(傷官)으로 작용하니, 그 성격은 활동적이고 재능이 뛰어나 어려서부터 다재다능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때로는 침착하고 냉정하여 모든 일을 확실하게 처리하며, 정확성을 고집하기 때문에 컴퓨터, 건축설계, 기계정밀가공업 분야에서 인정을 받는 사람이 많다. 재물의 관리 능력도 뛰어나 사업을 해도 성공할 수 있는 좋은 성격의 이름이다.

그는 히말라야 14좌 완등과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후에 많은 돈을 벌 수 있었고, 여기저기서 편하게 살 수 있는 좋은 제의를 받았지만 "남의 옷 입고 불편하게 살고 싶지 않다"며 거절했다. 적어도 두 아들에게 산에 관한 한 최고라는 소리를 듣는 아버지가 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산으로 간 산 사나이 박영석. 그는 사랑하는 후배 신동민, 강기석 대원과 함께 안나푸르나의 별이 되어 우리의 가슴에 영원히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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