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고향의 맛] 수화의 힘

수화의 차분한 힘은 고함의 위력 능가

이 세상에는 들리는 소리가 있고 들리지 않는 소리가 있다. '고함'이 있고 '수화'가 있다. 크게 외치는 소리가 고함이라면 들리지 않는 소리는 바로 수화다. 나는 수화의 힘을 믿는다. 우리 속담에 '목청 큰 놈이 이긴다'는 말이 있다. 그건 '법 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말과 맥을 같이한다.

불가에서 말하는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의 위에 있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눈의 작용인 '보임과 안 보임'을 귀의 역할인 '들림과 안 들림'에 대입해 보면 들리지 않는 수화의 차분한 힘이 고래고래 질러대는 고함의 위력을 능가할 수 있다는 얘기다. 목청 큰 놈이 설사 힘없는 약자를 먼저 제압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실이 아니면 어느 땐가는 결국 뒤집어지고 만다.

광주인화학교 청각장애자 성폭력 사건을 지켜보면서 '고함과 수화'의 위력을 비교해 보았다. 말 못하는 어린 농아들을 빈 교실에 가둬두고 성폭행을 저지른 짐승만도 못한 교사들은 힘과 고함을 무기로 그들의 야욕을 채웠을 것이다. 쉬쉬해 오던 사건이 터지자 짐승들은 거짓말과 궤변으로 사건의 본질을 흐렸으며 사건을 수임한 변호사들은 갈고 닦은 언변으로 증인으로 나선 농아들을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였다. 힘 있는 자가 아무리 사실을 호도해도 진실은 결코 묻혀지지 않는다.

사건 당시 공판을 맡았던 여검사인 임은정(37'법무부 심의관) 씨가 이 사건에 대한 분노의 심경을 담은 글을 검찰 내부 통신망에 올린 것을 옮겨본다. "6시간에 걸친 증인 신문, 이례적으로 법정은 고요하다. 농아들은 수화로 이 세상을 향해 소리 없이 울부짖는다. 어렸을 적부터 지속돼온 짓밟힘에 익숙해져 버린 아이도 있고, 끓어오르는 분노에 치를 떠는 아이도 있고…. 눈물을 말리며 그 손짓을, 그 몸짓을, 그 아우성을 본다. 변호사들은 그 증인들을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이는데 내가 막을 수가 없다. 피해자들 대신 세상을 향해 울부짖어 주는 것. 나 역시 내가 해야 할 일을 당연히 해야겠지."

'수화로 이 세상을 향해 소리 없이 울부짖는다'는 대목을 읽어 내려가자 한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연전에 기독교 봉사단체 회원들과 3박4일 일정으로 소록도를 방문,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었다. 일정이 끝나는 마지막 날은 섬 안의 교도소 마당에서 죄수들과 함께 예배를 보았다. 나도 크리스천이긴 하지만 한 번도 목사님의 설교나 기도에서 은혜를 받아 본 적이 없으며 불같은 성령의 힘을 느껴보지 못한 채 지금껏 살아왔다. 예배를 보는 중에 찬송가를 부르는 순서가 되었다. 단원 중에 청각장애자 한 사람을 둘러싼 대여섯 명의 소녀들이 단상으로 올라가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이란 찬송가를 수화로 부르기 시작했다.

수화 찬송을 듣고 있으니 갑자기 섬광 같은 불방망이가 뒤통수를 내려쳐 온몸에 전율이 일면서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쏟아져 손수건을 적시고 그것도 모자라 웃옷의 양 소매를 흠뻑 적셨다. '야곱이 잠깨어 일어난 후 돌단을 쌓은 것 본받아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아멘' 하고 4절이 끝나도록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소록도를 떠나면서 '선창에서 생선회 안주로 소주 한잔하자'는 후배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녹동항 주변의 목로집으로 들어갔다. 마침 비브리오균이 창궐하여 횟집은 손님이 한 사람도 없었다. 우린 하나님이 봉사활동의 공로를 인정하여 날것을 먹더라도 패혈증에 걸리지 않도록 해주실 것이란 믿음을 갖고 있었다. 선창에 앉아 바다 건너 소록도를 쳐다보기만 해도 수화 찬송의 감동과 눈물이 나의 영혼을 뒤흔드는 것 같았다.

요즘도 소록도의 그날을 회상하면 어떤 힘이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리게 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아마 수화라는 육신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소리를 영혼의 귀가 들었음이 분명하다. 들리지 않는 소리의 힘은 인간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사악함과 간악함을 눈물로 변주시키는 무서운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늦게서야 알게 됐다.

광주인화학교의 성폭력 피해자들의 수화로 울부짖는 소리가 드디어 하나님의 귀에 들린 듯하다. 노아시대에 물의 심판을, 소돔과 고모라에 불의 심판을 내리신 하나님이 농아들의 소리 없는 함성을 듣고서도 설마 가만히 앉아 계시진 않겠지. 하나님, 저 소리 들리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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