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시절, 같이 공부하던 신학생 친구가 드디어 서품을 받아 신부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우리와 함께 공부하던 친구의 혼배미사를 집전하게 되었다. 결혼식은 신랑 집이 있는 아비뇽에서 하게 되었다. 그는 아비뇽 여행을 하지 않았으면 같이 가자고 했다. 교황의 유폐지로 기억되고 있는 아비뇽은 현재는 연극제로 유명하다. 마침 연극제 시즌인 여름이었다. 나는 기회다 싶어 혼인 주례 신부를 철없이 따라나섰다.
역에 내렸다. 지면으로부터 더운 김이 훅하고 코끝을 스치며, 바로 여름 특유의 냄새를 뿌렸다. 여름의 냄새는 이상하게 한가로움을 품고 있다. 온통 돌로 이루어진 도시가 여름의 정적 속에 시간을 드리우고 있었다. 역에서 조금 떨어진 성 앞 광장에는 온갖 연극 무대가 차려져 있었다. 아마도 해가 빠져나가야 축제는 시작되는 듯했다.
아기자기한 역 부근을 빠져나와 신랑집으로 가는 길은 초행인데도 어디선가 본 듯이 정겨운 농촌길이었다. 키 작은 관목들이 푸근했다. 프랑스 남부의 평화스러움과 향취를 사진으로 찍은 듯이 그려놓은 알퐁스 도데의 작품이 떠오르는 곳이었다. 멀찍멀찍 떨어져 보이는 농가는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 도데의 물레방아를 그려보게 했다.
신랑집에 도착했다. 신부는 이미 와서 축하를 받고 있었고, 신랑은 바빴다. 결혼 주례를 할 신부는 중요한 사람이었지만, 신랑과 같이 공부한 여학생은 별로 관심이 없었다. 내 느낌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 있었다. 그래서 축하객들이 서로 인사하고 반가워하는 사이에 나는 혼자 산책을 나갔다. 군중 속에서 받은 내 충만한 휴식이었다.
이튿날은 오후에 혼배미사가 정원에서 이루어졌고, 저녁에는 하객들의 잔치가 이어졌다. 내 친구 신부는 술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날은 유쾌해서인지 술이 술을 부르고 있었다. 시간이 늦어지고 있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내게 신부가 술이 과한 듯하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내일 아침에 새벽 미사가 있는데, 술을 저렇게 마시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했다. 드디어는 나보고 말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사실 그 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나도 은근히 걱정이 되던 터였다. 그런데 말리라는 소리를 듣고 내가 내뱉은 소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이었다.
"미사는 본인이 더 잘 알잖아요. 알아서 할 거예요."
뜻밖이었지만, 이 말은 내 마음속에 변화를 일으켰다. 이 단어를 뱉고 난 다음에는 내게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가 알아서 할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러자 나는 들어가서 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그 친구는 새벽 미사 때 제대 앞에 서 있었다.
어쩌면 위대한 우정의 역사도 어느 순간 갑자기 다가오나 보다. "본인이 더 잘 알잖아요"라는 말은 이후 그와 내게 있어 실천강령처럼 되었다. 친구가 모든 일을 알아서 잘할 거라는 믿음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변화는 그 친구와의 관계에서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데도 퍼져 나갔다. 선생이어서인지 나는 남에게 참견하고 싶은 경우가 많았다. 길에서 고성방가하는 사람, 어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학생 등등 눈에 띌 때마다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 경험 이후부터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들 모두는 다 알아서 할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도데의 '별'에서 목동의 어깨에 내려앉은 아가씨의 머리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평생을 지니는 순간들이 있다. "별들의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을 때, 어깨 위에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가볍게 누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잠이 들어 무거워진 아가씨의 머리였다. 아가씨는 리본과 레이스, 꼬불꼬불한 머리를 사랑스럽게 내 어깨에 기대어 별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사라질 때까지 잠들어 있었다." 이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으나 두 사람 사이의 신뢰가 쌓이는 순간이다. 아침이 올 때까지 꼼짝 못하고 앉아서 만든 목동의 신뢰, 나아가 이 신뢰는 모든 사람에게 미치리라.
말은 행동이나 성품의 기초가 된다. 해내기 어려운 언어들이라도 한번 내뱉게 되면 그 말은 행동을 조절할 수 있다. 용서라든가 감사라는 말은 단 한 번의 발음으로 우리의 일생을 바꿀 수 있다. 단어의 마술이다.
김정숙/영남대 교수·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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