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9월 25일 대구시민야구장. 준플레이오프서 1승씩을 나눠 가진 삼성 라이온즈와 롯데 자이언츠는 3차전을 앞두고 대혈전을 예고하고 있었다. 승리의 간절한 염원은 삼성 쪽이 컸다. 삼성은 7년 전인 1984년, 한국시리즈 패배의 복수를 벼르고 있었다. 당시 삼성은 상대하기 쉽다고 여겼던 롯데를 한국시리즈 파트너로 골랐지만 최동원(4승)을 넘지 못해 창단 첫 우승을 롯데에 넘겨준 뼈저린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삼성은 3년 연속 대권 도전에 나선 반면, 롯데는 그 후 7년 만에 포스트시즌 진출권을 따내 1991년 준플레이오프는 관록과 패기의 대결로 관심이 쏠렸다. '우승 청부사'로 영입된 삼성 김성근 감독과 4년 만에 고향 팀에 복귀한 롯데 강병철 감독은 일찍 시작한 가을야구의 주인공이 될 꿈을 꾸고 있었다.
대구와 부산서 1승씩을 나눠 가진 양 팀 감독은 3차전을 승부의 분수령으로 봤다. 그러나 경기시작과 함께 김성근 감독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롯데 킬러'로 1차전 승리를 따낸 삼성 선발투수 성준이 1회초 롯데 김민호에 중월 2점 홈런을 내주며 흔들렸다. 김 감독은 분위기가 심상찮음을 감지했지만 이제 막 경기를 시작한 터라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그때, 불펜에서 몸을 풀던 투수 김성길이 김 감독에게 다가갔다.
"제가 올라가겠습니다." 김성길은 경기시작과 함께 비상대기조로, 불펜투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불과 이틀 전인 1차전서 이미 80개의 투구를 한 상태였다. 별다른 대안이 없었던 김 감독은 심판에게 교체사인을 냈다. 잠시 후 관중석에선 '부시맨'을 연호했다. 빼빼 마른 체구, 어눌한 표정의 김성길은 아프리카 원주민과 흡사하다고 해 대구 팬들은 그를 부시맨이라 불렀다. 그가 1회부터 구원투수를 자처하며 마운드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시즌 16승18세이브를 거둔 35세의 노장은 1989년 10월 8일, 인천 태평양전을 떠올리며 입을 굳게 다문 채 각오를 다졌다. 그때도 김성길은 10회 1사 2루서 성준의 뒤를 이었다. 위기를 벗어났지만 14회 2사 1, 3루서 김동기에게 통한의 끝내기 3점 홈런을 내줘 구원에 실패했던 그였다.
김성길은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겠다는 의지로 한 이닝 한 이닝, 투혼을 불살랐다. 3대3. 경기는 13회가 끝나도록 균형을 깨지 못했다. 4시간 31분의 혈전은 결국 무승부로 끝이 났다. 지금까지도 플레이오프 최장 경기시간 기록으로 남아있는 이날의 승부서 김성길은 12.1이닝(1실점)을 버텼지만 빈손으로 마운드를 내려왔다. 198개의 공을 던진 김성길은 기진맥진했고, 얼굴은 아쉬움을 지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전혀 소득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이날 김성길의 투혼을 지켜본 선수들은 힘을 냈고, 결국 롯데를 제압하고 플레이오프에 올랐다.
김성길은 그날 자신이 가진 모든 불꽃을 쏟아냈다. 야구인생의 정점을 찍은 김성길을 기다린 건 내리막이었다. 김성길은 그 후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앞서 1986년 겨울, 프로야구계는 한 선수 때문에 술렁였다. 일본 오릭스 버팔로스의 전신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뛰던 김성길이란 선수 때문이었다. 86년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내준 삼성은 김일융의 뒤를 이을 에이스급 재일교포 투수 영입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고르고 고른 게 김성길이었지만 그는 해태입단이 예정된 상태였다. 해태와 한큐는 자매결연 구단 사이였고, 전지훈련서 김성길을 본 해태는 이미 영입의사를 밝혔다.
치열한 물밑 영입전이 스토브리그를 뜨겁게 달궜다. 그러나 "삼성이 아니면 다른 팀에는 가지 않겠다"는 김성길의 말 한마디에 승자는 삼성이 됐다.
삼성은 뛰어난 로비로 김성길을 얻었지만 그는 기대를 채워주지 못했다. 87년 시즌 중 삼성에 합류한 김성길은 후반기 곧바로 투입됐지만 11경기서 1패3세이브 평균자책점 3.19에 그쳤다. 하지만 이듬해부터는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냈다. 88년 8승4패6세이브를 거두며 한국야구 적응을 끝낸 김성길은 89년 무너진 삼성 마운드의 구원투수로 진가를 발휘했다.
당시 삼성은 에이스 김시진을 롯데로 보냈고, 대신 영입한 최동원이 자기역할을 못하면서 마운드의 중심이 흔들렸다. 더욱이 88년 11승의 성준이 3승에 그치며 마운드는 붕괴 직전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류명선과 김상엽으로 버텼으나 팀 실점(588점)과 평균자책점(4.42)은 7개 구단 최하위였다. 그럴 때 김성길은 혼자서 233.1이닝을 책임지며 14승11패2세이브의 눈부신 성적을 거뒀다. 그는 침몰한 삼성 마운드의 '에이스'가 됐다. 김성길은 준플레이오프서 김동기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았지만, 그의 책임만은 아니었다. 삼성 타선은 그날 태평양 박정현에게 사상 최초로 14이닝 완봉패를 당하며 김성길을 돕지 못했다.
김성길은 실망하지 않았다. 김성길은 1990년 김상엽의 성장과 언더핸드 이태일의 입단(90년 9월 8일 사직 롯데전 프로통산 6번째 노히트노런 작성)으로 다소 숨통을 튼 삼성 마운드를 이끌며 13승으로 다승 5위, 빙그레와의 준플레이오프서 1승, 해태와 플레이오프서 1세이브를 거두며 노장의 관록을 과시했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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