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로 남은 프레이저와 알리의 '비극 3부작'
미국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SI)는 고(故) 조 프레이저와 '살아있는 전설' 무하마드 알리(69)의 세 차례 격돌을 '비극 3부작'이라고 표현했다.
알리와의 '세기의 대결'이 프레이저와 알리의 선수 생명을 단축했고 결과적으로 프레이저를 일찍 죽음으로 인도했다는 뜻에서다.
미국의 전설적인 복서 프레이저가 8일(한국시간) 간암을 극복하지 못하고 6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44년 미국 필라델피아 빈민가에서 태어난 프레이저는 백내장으로 말미암아 왼쪽 눈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앓았던 소아마비로 오른팔이 왼팔보다 짧았다.
거구들이 즐비한 헤비급에서 182㎝에 불과한 프레이저는 복싱 선수로서 많은 결점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불굴의 투지와 특유의 성실함으로 단점을 극복했고 1964년 동경 올림픽에서 미국 선수로는 유일하게 복싱 금메달을 따냈다.
놀라운 것은 프레이저가 왼손 손가락 골절 상태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는 사실이다.
1965년 프로로 전향한 프레이저는 첫 11경기에서 모두 승리를 따내며 유명세를 탔다.
저돌적으로 상대를 몰아붙이는 그의 복싱 스타일을 사랑한 팬들은 프레이저에게 '스모킹(총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라는 의미) 조'라는 애칭을 지어줬다.
프로 데뷔 3년 만에 세계 톱 클라스 위치까지 오른 프레이저는 1970년 지미 엘리스를 5라운드 만에 캔버스에 눕히고 헤비급 챔피언 벨트를 차지했다.
그리고 프레이저는 1971년 미국 뉴욕의 메디슨스퀘어 가든에서 당시 최강이었던 알리와 운명적인 첫 경기를 치렀다.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유명한 경기 중 하나로 꼽히는 이날 경기 15라운드에서는 프레이저가 레프트 훅으로 알리를 쓰러뜨리는 명장면이 나왔다.
알리는 곧 일어났지만 심판진 전원이 프레이저의 손을 들어줬다.
프레이저는 알리와의 이 대결 이후 3주간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그 정도로 치열한 승부였다.
총 3번 열린 프레이저와 알리 간의 '세기의 대결'에서 프레이저가 승리한 것은 이 경기가 유일했다.
첫 경기 이후 3년이 지난 1974년 1월28일 같은 장소에서 열린 두 번째 경기에서는 알리가 판정승을 거뒀다.
1975년 10월1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세기의 대결' 마지막 경기는 첫 번째 맞대결보다 더 처절했다.
15라운드에서 프레이저의 한쪽 눈이 안 보일 정도로 부어 오르자 트레이너가 수건을 던져 경기를 포기할 정도였다.
알리 역시 당시 경기가 끝난 뒤 그가 상상할 수 있는 죽음에 가장 근접한 경기였다고 술회했다.
자존심과 야망으로 점철된 '세기의 대결'에서 두 선수는 15라운드까지 난타전을 벌이며 죽음 직전까지 이를 정도로 처절한 승부를 펼쳤다.
결국 알리는 프레이저와의 마지막 맞대결 이후 남은 인생 대부분을 파킨슨병으로 고통받아야 했다.
프레이저 역시 분노 속에서 남은 인생을 살았고 열패감을 극복하지 못했다.
결국 프레이저는 1976년 조지 포먼에게 두 번째로 패배하고 나서 일찍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프레이저는 역사상 최고의 헤비급 복서 가운데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
전매특허인 레프트 훅은 복싱 역사상 가장 파괴력이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프레이저는 통산 37전32승4패(27KO)를 거뒀다.
알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의 전적은 더 화려했을 것이고 헤비급 챔피언 왕자 자리에 더 오래 머물렀을 것이다.
알리가 없었다면 흑인의 영웅은 알리가 아니라 프레이저였을 지도 모른다.
아울러 무의미한 추정일지는 몰라도 프레이저가 알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수명을 더 연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리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프레이저도 없었을 것이다.
프레이저와 알리의 맞대결은 사생결단의 승부를 일컫는 대명사가 되었다. 프레이저는 알리를 통해 전설이 되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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