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전 경북 칠곡군 지천면의 한 암자. 마을버스 종착점에서 1시간을 걸어 들어가야 하는 산속 암자에는 성철(成哲'45) 스님이 산다. 낮은 산이 병풍처럼 에워싸 세상의 소리라고는 새 지저귐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이곳에서 스님은 주지 스님인 어머니(79)와 단둘이 지내고 있다. 속세와 연을 끊은 그였지만 암세포를 쫓아내지는 못했다. 스님은 지금도 간에 번진 암세포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
◆윤호 씨, 세상을 벗어나다
스님이 지내는 암자의 이름은 염불암. 암자가 자리 잡은 산속 마을에는 총 4가구, 주민 6명이 사는 조용한 마을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과거를 묻지 않는다. 길에서 그를 만나면 두손을 모아 합장할 뿐이다. 스님이 출가를 결심한 것은 2006년 가을이었다."나는 사회와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회와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 말끝을 흐리는 스님 곁을 진돗개 보리가 꼬리를 치며 맴돌았다.
법명을 받기 전에 스님은'곽윤호'라는 이름으로 40년을 살았다. 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그는 중구 대신동에서 여성 의류숍을 운영했다. 디자인부터 의류 제작, 섬유 염색과 판매까지 해냈던 그는 열정적인'디자이너'였다. 가게를 운영한 지 5년에 접어들었을 때 위기가 찾아왔다. 판매뿐 아니라 여러 작업을 하다보니 직원들을 3명 이상 고용해야 했고 매출이 줄자 인건비 때문에 적자나는 나날이 늘어났다. 어쩔 수 없이 5년 만에 이 일을 그만둬야 했다. IMF가 갓 지난 1999년 그는 다른 직원없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새로운 사업을 구상했다. 당시 외환 위기 여파로 대구 중심가에는 임대료가 싼 건물이 넘쳐났다. 유동 인구가 많은 중구 봉산동에 커피숍을 차리기로 결심했고 행동으로 옮겼다. "그때만 해도 괜찮았어요. 카페를 드나드는 사람들이랑 이야기도 나누고, 큰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그럭저럭 지낼만 했어요."
하지만 스님은 사업 수완이 없는 사람이었다. 손님이 줄자 가게 운영은 물론 생활비를 대기도 어려웠고 카드를 사용하다가 빚만 늘었다. 뒤를 돌아보니 곁에 있어야 할 아내도 멀리 떠나고 없었다. 아내를 잃고, 가게를 잃고, 기댈 곳을 잃어버린 그는 한동안 멍하게 지냈다. 출가를 결심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속세에 남겨진 아이들
문제는 아이들이었다. 올해 고3인 윤주(가명'18)와 두 달 전 학교를 그만둔 윤호(가명'16)는 스님과 부모와 자식으로 엮인 인연이었다. 6년 전 아이들에게 산으로 들어가겠다고 말했을 때 아이들은 아빠를 붙잡았다. "아빠 산에 가지마. 스님 되지마." 출가의 뜻도 모르는 어린 아이들을 친척집에 맡겨 둔 채 눈물을 뿌리며 산으로 향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것이 힘들었던 아이들은 스님을 따라 염불암으로 왔다. 아이들에게 염불암 생활은 조심스럽고 또 불편했다. 스님과 단둘이 있을 때면 마음놓고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으면 이 호칭을 쓸 수 없었다.
대구 북구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윤주는 등굣길 자체가 전쟁이었다. 매일 아침 1시간씩 걸어 지천면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탄 뒤 대구로 가는 버스로 다시 갈아타야 했다. 학교를 가는데만 2시간이 걸렸다. "애가 학교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더라고요. 윤주 학교 근처에 사회에서 알고 지내던 친한 동생 가족이 살고 있어 그 집에 딸을 부탁했습니다."윤주는 11일 수능을 치르고 다시 염불암에 들어올 생각이다.
온전한 아버지가 될 수 없는 스님은 항상 아이들에게 미안해했다. "아버지, 학교를 그만 다녀야 할 것 같아요. 자퇴하겠습니다." 주말마다 중국집 배달,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했던 윤호는 두 달 전 학교에 자퇴서를 냈다. 아들의 의지를 꺾으려 했지만 윤호는 움직이지 않았고 스님은 윤호가 다니는 고등학교에 찾아가 자퇴에 동의했다. 자퇴 이유를 밝히지 않았던 아들은 얼마 전 스님에게 속내를 털어놨다. "아버지 많이 아프잖아요. 병원비는 어떻게 할거야? 나중에 검정고시 치고 돈 벌어서 대학가면 돼." 윤호는 지금 스님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주유소에서 먹고 자며 일하고 있다.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스님은 세상을 버리면 모든 고통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마음은 가벼워졌지만 몸은 점점 무거워졌다. 지난해 봄 스님은 소화가 안 되는 느낌이 계속 들어 약국을 찾아가 소화제를 사서 보름 동안 먹었다. 큰 병에 걸렸을 것이라는 의심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게 두 달을 넘게 버텼을까. 지난해 6월 수행을 하다가 스님이 쓰러졌다. 아무도 찾지 않는 암자에 119 구조대가 가장 먼저 찾아왔다. 그해 여름 스님은 간암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해 항암 치료를 받았다. 병원에서는 스님에게 간 이식을 권하고 있다. 하지만 스님은 마땅한 이식자를 찾기도 힘들 뿐더러 간 이식을 받을 치료비를 마련할 여력도 없다.
2009년 4월 스님은 죽음의 고비를 한차례 넘겼다. 지천면 일대 야산에 사흘간 대형 산불이 발상해 암자가 불탈 뻔한 상황에 마주했었다. 지금도 암자 벽에는 당시 화마에 그을린 자국이 남아 있다. 산불과 맞섰던 스님은 죽음 앞에서 초연해지는 법을 일찌감치 터득한 듯했다. 다만 걱정은 아이들이다. "만약에 아버지가 없으면, 혹시라도 아버지가 없으면." 간암 진단을 받은 뒤 스님은 아이들에게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죽음을 겁내지 않는 스님이라지만 세상에 홀로 남겨질 인연이 걱정돼 쉽게 눈을 감을 수 없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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