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필귀정] 높은 감식안이 발전을 불러온다

집이나 서점에서 책을 읽기보다 여러 책을 그저 둘러보는 것이 더 즐거운 경우가 많다. 읽히기를 갈망하는 책들이 표지에서부터 해대는 온갖 유혹들을 느끼는 것이 일단 좋다. 다양한 광고 문구를 들여다보고 언론의 서평이나 수상 기록 등을 찬찬히 뜯어보며 그 책이 얼마나 흥미로울지를 기대하게 된다. 백화점에서 옷들을 구경하며 기분 좋아지듯이 책을 읽는 것보다 구경하는 과정 자체가 행복감을 안겨주는 것이다. 영화관에서 보려는 영화보다 차기 상영작의 예고편을 보고 더 흥미를 느끼게 되는 것도, 휴가 전에 갈 곳을 살펴보며 기다리는 설렘이 더 큰 것도 아마 같은 이치일 것이다.

이처럼 선택하는 것보다 선택 이전의 과정이 더 좋은 것은 선택 이후가 기대보다 못한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책이나 영화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선택할 때 최선의 결정을 했다고 믿지만 막상 기대에 미치지 못해 실망하는 일이 흔하다. 그래서 부담이 수반되는 결정의 순간보다 느긋하게 둘러보는 결정 이전의 과정이 기대감을 자아내고 즐겁게 만든다. 책이든 영화든 아니면 다른 물건이든 구입을 염두에 두지 않고 단지 미리 살펴보거나 구입을 염두에 두고 고를 때에도 결정 이전의 둘러보는 과정이 행복한 여가의 시간이 될 수 있다.

많이 살펴보고 선택하더라도 낙심할 때가 적지 않지만 선택이 기대를 충족시켰을 때 기쁨은 배가 된다. 그러한 기쁨을 누리기 위해 제대로 된 선택을 위한 감식안이 필수적이다. 이 때문에 책이나 영화, 물건을 살펴보는 시간은 여가이기도 하면서 시행착오를 줄이고 감식안을 높이는 과정이기도 하다. 많이 둘러보고 살펴볼수록 감식안은 높아지며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선별 기준이 생기게 된다. 가령, 책이나 영화를 고를 때 베스트셀러인지 아닌지, 출연 배우가 누군지 등을 고려하기보다 작가나 감독에 더 주목하는 기준이 효과적일 수 있다. 일반적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독자적 기준을 세우게 되면 감식안이 높아져 선택의 실패를 줄이게 되고 취향도 발전시킬 수 있다.

나 같은 경우 이런 과정을 통해 한때 좋아하다 요즘은 좀 시들해졌지만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구사하는 스티븐 킹이나 실존 인물을 풍부하게 재현하는 슈테판 츠바이크를 만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뛰어난 글 솜씨 속에 신랄한 유머가 배어 있는 빌 브라이슨이나 닉 혼비 같은 작가는 언제나 반가우며 화려한 수사와 날카로움이 번뜩이는 평론가 정윤수와 강헌의 글도 좋다. 박찬욱 감독과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출연 배우가 누구이든 대체로 뛰어나며 클린트 이스트우드, 브라이언 드 팔마, 알란 J. 파큘라, 아벨 페라라 등 장인의 풍모를 지닌 영화감독은 꽤 많다. 훌륭한 작가와 감독들이라 해도 때때로 범작이나 졸작을 내놓곤 하지만 작가와 감독을 기준으로 한다면 기대를 배반당할 확률은 낮아진다.

문화생활이나 물건을 선택할 때처럼 정치도 참여하고 선택해야 할 분야이다. 정치는 최선보다 차악을 고르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간 우리 국민들은 정치에 대해 짜증 내고 냉소와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10'26 재'보선에서 나타났듯 젊은 층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높아지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요즘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나는 꼼수다'의 진행자 김어준이 정치 참여를 강조하는 책 '닥치고 정치'를 펴낸 후 많이 팔리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 참여가 늘고 있는 것은 긍정적이지만 정치에 대한 감식안을 높이는 것도 필요하다. 10'26 재'보선의 역풍을 맞은 한나라당의 쇄신 움직임이나 통합을 둘러싸고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는 야권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일은 그런 면에서 중요하다. 한'미 FTA 등 중요한 정책 사안에 대한 정당들의 입장을 따져보고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둔 정치인들의 공과와 행보를 주시하며 나중에 선택의 참고 자료로 삼아야 한다. 책이나 영화 둘러보기와 달리 정치 지켜보기는 무겁게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 흥미로운 구석도 적지 않다. 정치권의 게임적 요소를 즐기면서 기준을 세워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는 것이 유권자들의 역할이다. 유권자의 정치 감식안이 높아질수록 이를 의식하고 두려워하는 정치권은 전시성 변화보다 진정성 있는 변화를 꾀하게 되며 정치 발전도 이뤄질 수 있다.

金知奭/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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