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옥산에 있는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 ~1553) 선생이 심은 중국주엽나무(천연기념물 제115호)는 천연기념물로는 전국에 단 한 그루밖에 없는 희귀한 나무다.
날카로운 긴 가시와 작두콩 같은 큰 꼬투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신기해하는 주엽나무와는 가시의 모양에서 약간 차이가 날 뿐 외관상으로 크게 구분되지 않는다. 가시는 조각자(角刺)라 하여 피를 잘 돌게 하고, 부종(浮腫)을 내리며, 풍을 없애는 약재로 쓰인다.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친구에게 부탁하여 종자를 얻어 심은 것이라고 한다.
회재는 조선 전기 문신으로 동방 오현의 한 사람이다. 본관이 여주(驪州)로 아버지 번(蕃)이 양동마을 경주 손씨 가문으로 장가를 들어 외갓집 서백당(書百堂)에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1433~1484)다. 1553년(명종 8)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선생의 졸기는 다음과 같다,
삭탈관직 되어 유배 중인 이언적이 졸하였다. 언적의 자(字)는 복고(復古)요, 경주 사람으로 회재 또는 자계옹(紫溪翁)이라 자호하였다. 남달리 영특하였고 타고난 자질이 도에 가까웠다.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이 지극하였고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어 잠심(潛心)'역행(力行)하였으며, 예가 아니면 행하지 않았고 성품 또한 과묵하였으며 힘써 재능을 숨겼다. 어려서 급제하여 조정에 있었으나 기묘년 간에는 어떠한 인물인지 몰랐다.
중년에 바야흐로 발탁되었으나, 김안로(金安老)에게 미움을 받아 파직되어 전리(田里)에서 7, 8년을 살았다. 평소 고상한 아취가 있어서 경주 북쪽 자옥산(紫玉山) 속에 거처를 선택, 기괴한 바위와 깨끗한 시내를 사랑하여 그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주위에 꽃과 대나무를 심고, 날마다 시를 읊조리고 고기를 낚으면서 세상만사를 사절하는 한편, 방안에 단정히 앉아 책을 읽으며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을 깊이 하니, 공부가 전일에 비해 더욱 깊어져서 참으로 정밀하게 터득한 묘(妙)가 있었다.
김안로가 패망하자 다시 부름을 받아 등용되었다가 얼마 뒤에 전주 부윤(全州 府尹)으로 나가 청명한 정치를 펼쳤다. 일찍이 10조목의 소(疏)를 올렸는데, 의논이 순정하고 충정이 간절하여 개연히 세도(世道)를 만회할 뜻이 있었다.
중종이 이를 가상히 여겨 참판(參判)에 발탁하였으나 끝내 뜻을 펴지 못하고 또다시 모친의 연로로 벼슬을 사양하고 모친을 봉양하였으므로 조정에 오래 있지 않았고, 말년에는 병으로 고향에 머물러 있었다.
인종이 즉위하자 특별히 은소(恩召)를 두 번 세 번 내리니 드디어 병든 몸을 일으켜 좌찬성 직을 맡아 조정에 나아갔다. 인종이 승하하자 곧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 파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간 지 2년 후에 강계부(江界府)에 귀양 가서 7년 만에 졸하니,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처첩 등이 혹 굶주릴 때가 있어도 조상에게 제사 올리는 예는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다. 특별히 한 책을 편집하니 서명은 홍섬(洪暹)이 시의(時議)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지했으므로 끝내 올리지 못했다.
저서로는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속혹문'(續或問) '구인록'(求仁錄)이 있다. 또 '구경연의'(九經衍義)를 편찬하였는데, 완성하지 못했지만 공들인 것이 더욱 깊었다.
그의 학문이 연원은 없으나 스스로 사도(斯道)에 분발하니 은연중 빛나서 덕이 행실에 부합되고 문장이 붓끝에서 나오면 교훈되는 말이 후세에 전해져 동방에서 찾아보면 자못 비견할 사람이 드물었다. 선조 원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원(文元)이라 하였다.
회재가 이 나무를 심은 것은 1532년(중종 27). 공의 나이 42세 때로 여겨진다. 파직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주변을 아름답게 꾸밀 때 심었던 것 같다. 옥산서원은 수년 전 찾았을 때와 달리 정갈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세심대를 지나 독락당으로 향했다. 원줄기가 썩어 베어버렸고 수세가 나쁘다는 다른 자료의 기록과 달리 비교적 양호해 보였다. 특히 눈길이 가는 곳은 대문 칸의 어린 중국주엽나무였다.
조상의 혼이 깃들어 있는 이 땅의 오래된 많은 나무들이 후손들의 무관심으로 방치되고 있는데 비해 이 집은 달랐다. 후계목을 길러 놓아 현존하는 수식목이 노쇠하여 넘어지거나, 바람으로 쓰러질 것에 대비해 놓은 것이다.
나무 한 그루에도 정성을 다해 가꾸고 보살피는 명문가의 또 다른 모습을 엿볼 수 있어 유쾌한 마음으로 돌아 나올 수 있었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