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남희의 즐거운 책읽기]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 /이종묵·안대회 /북스코프

좌절은 발분의 계기…위대한 학문·예술 이룬 성지

"가시나무로 사방을 둘러 배 안에 있는 듯하나/ 탱자나무로 거듭 에워싸 하늘도 보이지 않네./ 담담히 앉았노라니 봄날은 차차 길어지고/ 괜한 걱정에 바뀌는 풍경조차 아쉽네./ 십 년 동안 난관 많아 공명을 못 이루고/ 흰머리에 벗들과 헤어져 병만 안고 사네./ 산가지 세며 책 읽은들 종내 어디에 쓰겠는가?/ 세상사 험한 길이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네."

18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한 수재였으나, 연산군에 맞선 죄로 거제도에 위리안치된 이행의 시다.

유배객들의 삶과 예술을 찾아가는 기행문 형식의 책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를 읽었다. 먼 옛날부터 유배는 사형 다음 가는 무거운 형벌이었다. 중죄를 저지른 자를 차마 죽이지 못해서 먼 곳으로 격리시키는 형벌이 유배였다. 우리나라에서 유배는 '삼국사기'에 기록이 보이는 만큼 그 유래가 매우 오래되었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도 유배의 형벌을 받은 이가 많았지만, 조선시대처럼 많지는 않았다. 15, 16세기 벼슬아치 4명 가운데 1명꼴로 유배를 당한 사실로 볼 때, 그 시대 이름난 벼슬아치치고 유배를 경험하지 않은 이는 거의 없었다고 해야 할 정도이다.

더구나 시대가 뒤로 가면 갈수록 유배의 장소는 서울과 더 멀어졌고, 아예 바다로 둘러싸인 섬으로 정적을 내몰았다. 정쟁이 심해질수록 정적을 향한 미움과 탄압이 심해져서 '위리안치'라는 추가 조치까지 적용되었다. 위리안치는 머무는 집의 지붕 높이까지 가시나무를 둘러쳐 외부와 완전히 격리시킨 형벌이다. 이 형벌은 연산군 때 처음 시행되었다.

유배된 섬은 절망의 땅이었다. 좁은 감옥 안에 가두어지지는 않았지만, 유배는 대부분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은 무기 징역형이었기에 다시 돌아간다는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렇다고 유배지가 고통과 절망의 땅만은 아니었다. 몇몇 유배객은 유배의 체험을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몸의 안식과 마음의 평화를 얻는 기회로 삼기도 하였다. 절망의 나락에 있는 이들을 위안한 것은 자연과 문학이었다. 그들 문학의 정수가 대개 절박한 유배기에 나왔다는 것은 그리 이상하지 않다.

반면 절망의 상태에서 모진 목숨을 지탱하다가 그 분한 마음에 허무하게 생을 마친 사람도 적지 않았다. 또 억울하게 섬에 갇힌 분노를 학문으로 승화시킨 이도 있었다. 정치적 좌절은 발분의 계기가 되고, 절망스런 유배의 섬은 위대한 학문을 이룬 성지가 되기도 하였다. 우리 역사에서 유배가 없었다면 조선 학문의 폭과 깊이가 그만큼 이루어졌을까 의문이 들 정도이다. 숙종이 아끼던 장희빈을 반대하다 남해도로 유배된 김만중은 남해도에 귀양 가 한글로 '사씨남정기'를 지었고, '서포만필'을 완성하였다. 일찍이 선천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는 '구운몽'을 지었던 그다. 우리 옛 소설 가운데 지금껏 가장 널리 읽히고 작품성도 인정받는 '사씨남정기'는 현숙한 부인인 사씨 부인의 고난을 다룬 이야기로,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대립을 소설로 형상화한 작품이라는 해석이 있으며, 김만중의 유배 행적과 겹친다.

유배지가 된 섬은 뛰어난 글씨와 그림도 생산하게 하였다. 이광사는 개인적 불행을 딛고 유배지인 신지도에서 '동국진체'로 일컬어지는 글씨를 남겼다. 조희룡은 그림으로 유배지 임자도를 빛냈다. 한편 백령도로 유배 간 이대기는 '백령도지'라는 글을 남겼는데, 400년 전에 직접 보고 들은 백령도의 전모를 충실하게 기록한 가치 있는 글이다.

"현산은 흑산이다. 현산 바다의 어족은 지극히 번성하지만 그 이름을 알고 있는 어족은 드물었다." 다산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은 유배지인 흑산도에서 어부 장덕순의 도움을 받아 박물학의 위대한 저술인 '현산어보'를 완성하였다. 이 책은 책에서 얻은 지식의 정리가 아니라, 현장에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산지식을 혜안을 가지고 연구한 책이다.

깔끔한 글과 함께 이한구의 섬과 바다 사진이 책 읽는 눈을 시원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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