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퇴근길, 누가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누군가 했더니 어깨를 치며 떨어지는 플라타너스 낙엽. 올려다보니 정수리로 쏴아 하고 강물 소리가 쏟아진다. 탈모증 걸린 사내처럼 우수수 낙엽을 쏟아내는 나무의 모습을 새삼스럽게 바라본다. 내가 생각하기에 대구의 큰 자랑거리는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아닌가 싶다. 이 지역을 방문하는 지인들이 하나같이 입 모아 부러워하는 것이 플라타너스 가로수다. 경대병원역에서 국채보상로까지 이어지는 간선도로나, 상동네거리에서 중동네거리까지 줄지어 선 플라타너스 고목은 유럽의 어떤 유서 깊은 거리를 걷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상동시장 안의 이차선 도로는 플라타너스 이파리가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덮고 있어서 여름철이면 푸른 터널을 이룬다. 나는 그곳을 자동차로 지날 때면 최대한 속도를 낮춰 그 푸른빛을 한껏 즐기곤 한다. 요즘 같은 때는 낙엽이 헌 신문지처럼 수북이 쌓여 있어 늦가을의 정취를 실감할 수 있다. 잎이 크기 때문에 낙엽의 존재감이 그만큼 두드러지는 것이다. 도시에 가로수가 없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가끔씩 상상의 지우개로 가로수를 지워놓고 거리를 보면 나무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저녁을 먹고 산책 삼아 동네에 있는 은행나무를 만나러 간다. 수백 년이 된 나무가 요즘 병을 앓고 있어서 문병 가는 것이다. 20여 년 전 이 동네로 이사 왔을 때, 이 할아버지나무가 한눈에 내 맘을 사로잡았다. 수십 미터의 큰 키에 어른 몇 사람이 안아야 할 정도로 허리가 굵은 나무다. 이파리 농사는 또한 얼마나 실하게 짓는지 가을이 되면 온 동네를 황금빛 이부자리로 덮어주었다. 최근 도심 재개발 붐이 일어나더니 기어코 이 동네에도 열풍이 불어닥쳐 나무의 운명이 자못 위태로워졌다. 넘치는 생명력으로 일상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해 주던 나무, 작은 운동장만 한 이 나무의 몽리 면적을 이 시대의 천박한 자본주의가 과연 허용할 것인가. 독일 함부르크에서 본 풍경이다. 함부르크역 앞의 플라타너스 거목은 큰 빌딩 숲에서도 제 모습을 온전히 지킬 정도로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도 식견 있는 설계자를 만난 덕분인지 이 은행나무는 다행히 살아남았다. 하지만 지난여름부터 나무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알아보니 소공원을 조성하면서 뿌리 부분을 너무 깊이 파낸 것이다. 설계도에선 빠져나왔는데 정작 엉뚱한 곳에서 죽음을 맞이할 형편에 처했다. 무성했던 잎이 다 말라버리고 앙상한 뼈다귀만 남은 모습이 너무 안타깝다.
돌이켜보면 이런 장면을 한두 번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아파트 주차장에 있는 플라타너스는 해마다 가을이 되면 손발 다 잘린 채 구차한 삶을 이어간다. 히말라야시더는 또 어떤가. 히말라야시더 수형은 원래 이등변삼각형이다. 가지를 수평으로 펴고 차례차례로 수직으로 뻗어나간다. 그런데 어떤 히말라야시더들은 두 팔을 하늘로 치켜들고 서 있다. 마치 벌서는 아이처럼. 잦은 톱질을 피해 스스로 그런 운명을 선택한 것이다. 그 궁색한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파온다. 인간을 유달리 좋아했던 순한 성품 탓으로 천형의 세월을 사는 가축처럼, 영문도 모르고 인간의 마을로 끌려온 나무가 아무 잘못도 없이 벌서고 있는 것이다.
김경미 시인은 야채사(野菜史)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 꽃이었다 한다/ 잎이나 줄기가 유독 인간 입에 달디단 바람에/ 꽃에서 야채가 되었다 한다."
모든 게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 탓이다. 토마토의 열매를 토마토라고 부르고 사과나무의 열매를 사과라고 하는데, 장미의 열매는 왜 장미라고 부르지 않는가. 개나리나무의 열매를 왜 개나리라고 부르지 않는가. 인간의 눈에는 꽃만 들어오기 때문이다. 먹을 수 없는 것들은 이름조차 없다. 필요에 의해 가로수를 심어놓고는 간판을 가린다고, 낙엽 치우기가 귀찮다고 수시로 톱질하고 마구잡이로 나무를 학대하는 사람들. 정말 그래도 되는가. 옷 한 벌 없이 강추위와 땡볕을 견디며 문명의 살벌함을 이기고 도시의 풍경을 완성하고 있는 저 고마운 나무들을 편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가 없다.
장옥관/시인·계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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