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소비자 주권' 비웃는 교묘한 기업 마케팅

묶음판매가 낱개보다 값싸 즐긴다고? 고로 당신은 상술에 놀아난 봉!

'나는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현대인들의 삶에서 '소비'는 빼놓을 수 없는 일상이다. 생활의 기본 요소인 의'식'주부터 인간의 행동 무엇하나가 소비와 연결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소비생활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것은 당연히 소비자여야 한다. 자유경쟁을 원칙으로 하는 자본주의경제에서 경제유형, 산업구조, 생산유형 따위를 결정하는 최종적인 권한은 소비자에게 있는 것이다. 바로 '소비자 주권'이라는 개념이다. 거창한 개념을 들먹거리기 이전에 기업들은 어떻게 하면 소비자들을 만족시킬까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들의 구미에 맞는 제품을 내놓고, 이목을 사로잡기 위해 마케팅에 골몰하니 얼핏 소비자가 주권을 쥐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 우리의 소비생활을 집중 분석해보자. 진정 우리의 소비생활은 '내 뜻대로' 움직이고 있는가?

◆더 주고도 더 낮은 가격 받는 이상한 대형마트

혼자 자취 생활을 하고 있는 직장인 김나연(28'여) 씨. 그녀는 샴푸와 린스를 사야 할 때마다 답답한 마음이 든다. 대형마트의 마케팅 상품의 구성은 샴푸 2개와 린스 1개가 한 묶음이다 보니 늘 샴푸는 남아돌고 린스는 부족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김 씨는 "아무리 코너를 빙글빙글 돌면서 린스가 더 많은 상품을 찾아봐도 매장 직원은 '그렇게는 판매하지 않는다'고만 말한다"며 "하지만 워낙 낱개 판매와 묶음 판매의 가격 차가 크다 보니 린스만 따로 사는 것은 바보 같은 짓 같다"고 푸념했다.

실제 마트에 들러 가격을 비교해봤다. P사의 샴푸'린스(850㎖) 제품의 낱개 가격은 8천900원. 하지만 '행사상품'이라는 이름으로 샴푸 2개와 린스 1개가 묶음으로 포장돼 1만6천800원에 판매되고 있다. 낱개로 이 구성을 사는 것과 비교하면 무려 9천900원의 가격 차가 발생하다 보니 소비자들은 정작 필요한 것은 린스 1개지만 샴푸 2개를 추가로 구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A사의 제품 역시 가격구조가 너무 터무니없었다. 샴푸나 린스(780㎖) 낱개 제품 하나의 가격은 1만3천원. 하지만 행사상품이라는 명목으로 샴푸 2개와 린스 1개 묶음 가격은 1만9천500원(낱개 구매 시 3만9천원인 것과 비교해 절반 가격)으로 추락한다. 심지어는 여기에다 400㎖ 용량의 샴푸 하나를 더 끼워주기까지 하니 굳이 린스 1병만을 제값 주고 사지 않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서희숙(44'여) 씨는 욕실에 5, 6개씩 굴러다니는 남편의 일회용 면도기를 볼 때마다 의아함이 든다고 했다. 날만 교체하면 계속 쓸 수 있도록 만들어진 면도기이지만, 문제는 날만 구매하는 가격이 너무 비싸다 보니 행사상품으로 내놓은 본체까지 함께 구성된 제품을 구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S사의 면도기 경우 본체와 날 8개가 함께 포장돼 있는 묶음 제품의 경우 가격이 1만6천500원. 하지만 본체를 계속 재활용하기 위해 날만 8개를 구매하는 데는 1만8천800원이 든다. 본체까지 끼워주고도 2천300원이 더 싸니 소비자들은 필요도 없는 본체를 어쩔 수 없이 집으로 가져간다.

환경에 작은 보탬이 되고자 가능하면 용기 제품보다는 리필제품을 구매하고 싶다는 박효정(42'여) 씨 역시 가격에 문제를 제기했다. P사 섬유유연제의 경우 비닐팩에 포장된 2.1ℓ 제품의 경우 100㎖당 가격이 270원이지만, 플라스틱 용기에 든 3.5ℓ 제품의 경우에는 100㎖당 가격이 209원으로 더 싸다는 것. 박 씨는 "상식적으로 비닐팩에 든 리필제품이 용기에 든 제품보다 더 싸거나 최소한 가격이 똑같기라도 해야 리필제품을 이용하는 것 아니겠냐"며 "하지만 리필보다는 용기 제품 가격이 더 싸게 책정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한푼이라도 아끼려는 주부 입장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플라스틱 용기 제품을 들고올 수밖에 없다"고 했다.

◆내 돈 주고 필요한 옵션을 구매 못해?

수천만원짜리 자동차를 구매하는 데 있어서도 소비자들의 권리 따위는 온데간데없다. 내게 꼭 필요한 옵션만을 선택하고 불필요한 것은 배제해 가격을 줄이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특정 옵션 하나를 위해서는 아예 차 등급(트림)을 바꿔야 하는 등의 불합리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평소 땀이 많아 통풍시트가 필요했던 이준상(37) 씨. 하지만 쏘나타 차량을 구매하려고 매장을 찾았더니 통풍시트가 가능한 차량 등급은 프리미어(premier)급으로 그가 당초 구매하려고 예상했던 프라임(prime) 등급에 비해 200만원이 더 비쌌다. 이 씨는 "40만원짜리 옵션 하나를 더 추가하기 위해 200만원 비싼 차량을 구매해야 한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고 언성을 높였다.

사실 차량의 옵션 끼워팔기 관행은 하루이틀 제기된 문제가 아니다. 원하는 옵션이 '기본형' 모델에서는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고급형'을 구매하느라 수백만원 더 비싼 차량을 사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차량 1대로 부인과 함께 사용하는 김병우(41) 씨는 "운전석 메모리 시트 기능이 있으면 아내와 함께 차를 사용하기가 훨씬 편리할 것 같았지만 이 기능 하나를 위해서는 가장 비싼 등급인 2천800만원짜리 차량을 구매해야 해 결국은 옵션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한국자동차소비자연맹의 이정주 회장은 "그나마 지속적인 문제 제기를 통해 최근에는 차량 안전과 관련된 장치들은 옵션이 아니라 기본으로 제공되고 있지만, 편의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여전히 불합리한 끼워팔기가 많다"고 지적했다.

특히 최근에는 자동차 업체들이 트림(특정차량 배기량별 세부모델)을 최소화하는 정책으로 변화를 시도하고 있어 앞으로 소비자들의 선택권은 더욱 제한될 수밖에 없는 상태. 자동차 업계는 ▷브랜드 이미지 제고 ▷수익성 개선 ▷동급 차량 간 가격간섭 최소화 ▷차별화된 프리미엄 이미지 구축 등을 이유로 트림을 2, 3개로 축소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생산편의성만 생각할 뿐 소비자들은 전혀 존중하지 않는 기업 행태"라며 "지금도 원하는 옵션의 차량을 구매하지 못한다는 불만이 많은데 트림을 축소할 경우에는 선택의 폭은 더욱 좁아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실상 강권하는 이상한 상술

이외에도 우리는 '소비'하는 데 있어 수많은 불합리성에 발목잡혀 산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에는 '강압아닌 강압'이라는 상술이 숨어 있다. 결혼식의 경우 웨딩 업체를 통해 스튜디오 웨딩 촬영과 드레스, 메이크업, 예식장 예약까지 한꺼번에 하면 공동구매 효과가 있어 저렴하다고 홍보하지만 사실 이 속에는 상당한 가격 거품이 끼여 있는 경우가 많은 것. 더구나 특정업체 밀어주기를 통해 교묘하게 자신들에게 많은 이윤을 남겨주는 스튜디오나 예식장을 선택하도록 권유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예비부부들의 '취향'과 '선호'는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장례식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장례식장 이용을 위해서는 장례용품부터 손님 접대 음식과 제수품, 장의버스 등을 강매하는 경우가 많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스마트폰 요금제 역시 소비자들의 선택권이 존중되지 않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음성통화와 문자서비스 데이터 통신요금을 묶은 스마트폰 전용 요금제의 경우 개인들의 통신스타일에 따른 차이가 전혀 반영되지 않는 것. 아이폰 사용자인 임은주(27'여) 씨는 데이터 통신량이 1G를 훌쩍 넘어서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무제한 데이터 요금을 사용하기 위해 5만5천원짜리 요금제를 사용하고 있지만, 문자도 남아돌고 무료통화 역시 매달 70~80분가량이 남아도는 상황이다. 임 씨는 "최근 통신사들이 맞춤형 요금제를 내놨다고는 하지만 이 역시 선택폭이 좁아 스마트폰 요금제와 별반 차이가 없어 그냥 사용하고 있다"며 "남아 도는 문자나 음성통화를 기부라도 할 수 있게 해주면 좋겠지만 쓸데없이 통신사 배만 불리는 것 같아 불쾌하다"고 했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