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교포 김성길은 고국 무대를 밟은 지 5년째인 1991년,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그는 마치 종족 번식을 위해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투혼을 발휘했다. 자신의 임무를 다한 그는 연어처럼 마운드에서 사라졌다.
그해 삼성 마운드는 5월 류명선의 부상으로 빨간불이 켜졌다. 김성근 감독이 믿을 건 김성길뿐이었고, 그는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188이닝을 책임졌다. 9월 7일 롯데와의 더블헤더서 연속 승리투수가 되는 등 김성길은 52경기에 등판, 16승12패18세이브, 평균자책점 3.30을 기록했다. 시즌 중반 이후 마무리로 돌아서서는 5경기 연속 세이브를 쌓는 등 18세이브를 거두며 구원왕에 도전장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해 창단한 쌍방울의 조규제(49경기 9승7패27세이브)를 넘지 못했다. 최하위팀 조규제와 달리 김성길은 매 경기 피 말리는 순위 경쟁서 등판했고, 한 번 등판하면 2이닝씩을 책임졌다. 그러나 그의 투혼을 삼성 빼고는 알아주는 데가 없었다.
김성근 감독은 준플레이오프서 무리하게 등판시킨 김성길을 플레이오프 1차전서는 벤치서 쉬게 했다. 삼성은 빙그레 안용덕에게 3안타 완봉패를 당했다. 그러나 2차전서 송진우와 맞붙은 선발 김상엽이 10회말 이중화에 내야안타를 맞자 김 감독은 다시 김성길 카드를 빼내 들었다. 첫 타자 조양근을 3루수 앞 병살코스로 유도하며 불을 끄는가 싶었으나 김용국의 악송구로 불은 더 크게 번졌다. 결국 김성길은 무사 2, 3루서 김상국에게 끝내기 희생플라이를 맞으며 경기를 내줬다. 2패로 벼랑 끝에 몰린 김 감독은 3차전서는 김성길을 선발로 올렸고, 그는 1실점 완투승으로 팀에 첫 승리를 안겼다. 하지만 삼성은 더는 승리하지 못해 1승3패로 한화에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내줬다.
김성길은 92년에도 마운드에 올랐지만 그의 팔은 이미 엉망진창이 된 뒤였다. 1승7패1세이브. 김성근 감독이 옷을 벗었고 김성길도 쌍방울로 트레이드 됐다. 쌍방울서 93년 2승5패6세이브에 그친 김성길은 통산 54승46패36세이브 평균자책점 3.39의 기록을 남기고 일본으로 떠났다. 김성길의 공은 빠르지 않았다. 위력적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언더핸드 투수 중 유일하게 싱커를 던질 줄 알았다. 그의 공은 방망이 중심을 교묘하게 피해갔다.
김성길의 룸메이트였던 계명대 류명선 야구감독은 "그는 대단한 선수였다. 그러나 국내 선수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고국이지만 익숙지 않은 환경에 많이 외로워했다. 늘 말이 없었고, 훈련 땐 혼자서 손목운동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김성길을 쌍방울로 보내며 삼성의 재일교포 선수시대도 사실상 막을 내렸다. 87년 김성길 입단 이후 삼성엔 정용생(88년'투수), 송광훈(89년'투수), 김실(94년'외야수) 등 재일교포 선수들이 푸른 사자 유니폼을 입었지만 뚜렷한 성적을 남기지 못한 채 현해탄을 건너갔다.
야구해설가 최종문 씨는 "탄탄한 기본기를 갖춘 재일교포 선수들의 활약은 출범 10년이 한계점이 됐다. 국내선수들의 실력 향상으로 값어치가 떨어졌다. 희망을 품고 고국을 찾았지만, 한국서도 벤치를 지키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삼성은 84년 1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재일교포 투수 김일융과 긴데스 버팔로즈에서 포수로 활약한 송일수를 스카우트 하며 본격적인 재일교포 시대를 열었다. 이들이 몸담았던 3년은 삼성의 전성기였다. 84년 전기리그 우승에 85년 통합우승의 쾌거를 이뤘다. 86년 계약만료로 두 선수가 일본으로 돌아간 뒤 바통을 이은 건 86년 청보 핀토스가 스카우트한 김기태였다. 12월 김근석'정현발과 트레이드 돼 삼성 유니폼을 입은 김기태는 그러나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김성길 이후 최일언(투수'91~92년)'강춘경(외야수'92~94년), 강태윤(외야수'93~95년), 한명호(투수'93~95년) 등이 입단했지만 빛을 보지 못했다. 김실(외야수)은 94년 타율 0.273, 이듬해 0.201을 기록한 뒤 쌍방울로 트레이드 됐다.
83년 30승의 불후의 기록을 남긴 장명부는 88년 선수가 아닌 코치로 삼성에 발을 디뎠으나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해태에서 6년간 이름을 날린 포수 김무종은 이만수'박정환'조범현 등 은퇴를 앞둔 선수들을 대신할 젊고 강한 포수 조련의 임무를 띠고 91년 1월 배터리 코치로 선임됐지만 자신을 픽업한 김성근 감독이 92년 10월 중도 해임되자 일본으로 돌아갔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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