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논단] 얘들아, 싸우면서 사이좋게 놀아라

수년 전의 일이다. 교양강좌 수업에 왔던 학생 하나가 뜬금없이 연구실로 찾아와 결혼식 주례를 청했다. 다소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쾌히 승낙했다. "왜 나냐?" "꼭 나여야 하느냐?"는 상투적인 질문조차도 하지 않았다. 용모 단정하고 생각도 반듯한 선생들을 두고, 굳이 징발수염에 생각조차 그다지 결혼식 주례에 어울릴 법하지 않은 나를 주례로 원하는 용기가 가상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주례사였다. 평소 학교 안팎의 강의에서 즉흥적인 나의 버릇은 주례사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결혼식장으로 가는 지하철 속에서도 내 머릿속에 준비된 주례사는 단지 '둘이 하나되기 위한 싸움'이 전부였다. 무조건 싸움을 피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싸우면서 이해의 지평을 맞출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거두절미하고 '싸움찬미'로 주례사를 시작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났으니 어찌 싸우지 않을 수 있느냐? 싸우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하다. 살다 보면 싸울 일이 생길 것이다. 무조건 싸움을 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주례사가 시작되고 10여 분 동안 내내 싸움 찬미만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문득 예식장 안의 분위기가 썰렁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혜롭게 싸워야 한다, 창조적으로 싸워야한다는 당부로 주례사를 끝냈지만, 이미 분위기를 되돌리기에는 너무 멀리 가버렸다. 싸움 찬미에 취한 나머지 싸움을 통한 '아름다운 조화'가 뒷전으로 밀려났던 것이다. 장소가 장소니만큼 "싸우되 사이좋게 잘살아라"는 덕담이 강조되었어야 하는데, 어쩌다 보니 "너희들은 지금 이 시간부터 싸우고 또 싸워야 한다"는 싸움 찬미가 주례사의 전면에 부각되고 말았던 것이다. 결혼식이 끝나고 신랑의 아버지를 만났을 때, 나의 주례사에 뭔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도 선생이란 작자가 이제 막 가정을 이루어 출발하는 제자 부부에게 너희는 싸우고 또 싸워야 한다는 훈계를 한 꼴이 된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그 주례사의 내용에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주례사의 내용이 아니라 장소였다. 내가 싸움 찬가를 부른 그곳은 강의실이 아니라 예식장이었다. 이 점을 염두에 두었어야 했다. 자연이라면 또 모를까, 적어도 사람이 끼는 한 조화는 그냥 일어나지 않는다. 조화의 배후에는 반드시 싸움이 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이의 조화는 반드시 이에 선행하는 투쟁을 필요로 한다. 투쟁과 조화는 서로 짝이다. 사람과 사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새 옷이 금방 편해지는 경우는 없다. 내 몸과 옷, 내 마음과 옷 사이에 서로 밀고 당기는 싸움의 과정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조화를 이루고 편안해진다. 아름다운 동행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싸움이라는 말의 의미는 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아름다운 조화에 앞서는 싸움은 승리를 위한 싸움이 아니다. 누가 이기든 승자가 있는 한 패자가 있기 마련이며, 승자와 패자가 있는 싸움은 너 죽고 나 사는 싸움 아니면 너 살고 나 죽는 싸움일 뿐이다. 조화를 가져오는 싸움은 아니다. 조화는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싸움, 너를 살림으로써 나도 사는 싸움으로 생겨나는 결실이기 때문이다.

싸움은 '서로 이해의 지평을 맞추자는 노력'이어야 한다. 부부가 싸워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났으니 이해의 지평을 맞출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싸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싸움을 두려워하는 한 아름다운 관계, 뜨거운 관계는 요원하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서 싸우지 않는다는 것은, 극단적으로 말하여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사고방식의 반영일 수도 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라면 싸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지근한 관계가 아니라, 두 몸을 포개어 한 몸을 이루는 뜨거운 관계를 원한다면 싸우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요즘에는 아이들도 싸우지 않는다. 이전 같으면 같이 놀다가 주먹다짐으로 싸우기도 하는 게 예사였지만, 요즘 아이들은 그렇게 싸우지 않는다. 서로 이해의 지평을 맞추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차라리 너는 너고 나는 나로 사는 방식에 익숙하다. 너 아니라도 컴퓨터가 있고 게임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이들의 마음속에 잠재한 싸움이 그냥 해소되는 것 같지는 않다. 왕따니 이지메니 하는 것은 아이들의 싸움이 음성적으로 흐른 부작용으로 봐도 무방하다. 혹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타일러야 하는 게 아닐까? "얘들아, 싸우면서 사이좋게 놀아라."

이거룡/선문대 교수·요가학교 리아슈람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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