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은 한 번 얻으면 백세토록 버리지 않는다. 내가 바라는 바가 있는즉 온 나라가 양반이 되게 하여 온 나라에 양반 없게 하자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여유당전서'에서 백성이 양반 되길 갈망했던 당시 사회상을 글로 남겼다. 왜 모두 양반 되려 했을까. 양반들은 군역(병역), 세금 등에서 많은 특혜를 누렸다. 조선의 양천(良賤) 신분제에서 양반 되긴 어려웠다. 양반이 속한 양인(良人)도 적었다. 반계 유형원(1622~1673)은 '반계수록'에서 "조선조에 천민이 되는데 들어감은 있으나 나감은 없다. 천민은 점점 많아져 열에 여덟 아홉, 양인은 점점 줄어 겨우 하나 둘"이라 할 정도였다. 백성 대부분 천민이었다. 천민 증가는 양반 되긴 어려우나 부정부패, 군역과 세금 등 온갖 부담에 시달린 양인이 신분을 버리고 천민 되기를 택했기 때문. 또 부모 중 한쪽이 천민이면 자녀 모두 천민이 되는, 일천즉천(一賤則賤)이란 가혹한 종부종모제(從父從母制) 역시 한몫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엄한 규제에도 양반은 늘었다. 양반만의 특혜는 어떤 대가와 희생을 치르고도 추구할 만했다. 이런 특혜는 신분 상승만이 가능케 했다. 다산은 "양반이 된 이후 비로소 군포(軍布)를 면하는 까닭으로 백성이 밤낮으로 꾀하는 것은 오로지 양반이 되려는 것"이라며 그 이유를 분석했다. 양반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1778년 정조실록의 "백성 중 사족이란 명색의 사람이 거의 5분의 2"라는 대사성 유당의 상소문처럼 40%가 양반이었다. 대구의 호적 분석 사례지만 1858년 경우, 양반은 70%였다.(시카타 히로시 논문) 이 열기는 1894년 갑오개혁의 신분제 철폐로 멈췄다.
그 비슷한 현상은 지금도 있다. 대학 진학이 그 한 모습이라면 지나칠까. 1980년 27%이던 대학 진학률이 지금 80% 넘어 세계 1위다. 특히 '스카이대학'이란 몇몇 대학에 대한 갈망은 더하다. 직장, 부(富), 명예 때문이다. 고졸 임금이 100일 때 대졸은 160~170 수준이니 그럴 수밖에. 대학이 신분 상승의 한 방법이 됐다. 최근 영국 BBC방송은 "한국에서는 대학수학능력시험으로 어느 대학에 갈지, 그리고 미래의 연봉과 지위가 어떻게 될지 결정된다"고 보도했다. 젊은이들에게 꿈, 개성 찾기보다 연봉과 지위를 결정짓는 대학에 가도록 내모는 현실이 안타깝다. 불행했던 조선의 '온 나라 양반 되기' 열풍이 우리에게 말하는 건 뭘까.
정인열 논설위원 oxe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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