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흥무관학교 최후의 1인] <4.끝> 대를 이은 가문 재건 노력

고난의 길 걸은 추산 후손들 "나라 지킨 독립운동 명문가 자부심"

100년 전 추산 권기일 선생의 만주 항일투쟁과 나라를 사랑하는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추산선생 기념비(안동 남후면 검암리 대애실 마을 입구) 앞에서 추산의 손자 권대용 씨가 할아버지의 높은 뜻을 기리며 독립운동으로 쓰러진 안동권씨 대애실 가문 재건을 위한 생각에 잠겨 있다. 이 기념비는 이동석 전 도청유치주민연합 수석간사가 시민들의 뜻을 모아 지난 2001년 세웠다. 권동순기자 pinoky@msnet.co.kr
100년 전 추산 권기일 선생의 만주 항일투쟁과 나라를 사랑하는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추산선생 기념비(안동 남후면 검암리 대애실 마을 입구) 앞에서 추산의 손자 권대용 씨가 할아버지의 높은 뜻을 기리며 독립운동으로 쓰러진 안동권씨 대애실 가문 재건을 위한 생각에 잠겨 있다. 이 기념비는 이동석 전 도청유치주민연합 수석간사가 시민들의 뜻을 모아 지난 2001년 세웠다. 권동순기자 pinoky@msnet.co.kr

"민족의 제단에 몸 바친 추산의 정신을 가슴에 되새기고, 이국만리 만주 땅에 누워 계신 그의 넋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과 그의 후손들이 다시 벌떡 일어설 수 있도록 격려하자는 생각에서 이 책을 엮게 됐습니다. 추산의 후손들이 그네들 스스로 사라진 명가를 다시 복원해 선조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대대로 이어가고, 그래서 우리 민족정기와 역사의 정의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꼭 확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일본군의 공격으로부터 신흥무관학교를 사수하다 최후의 1인이 된 순국지사 추산 권기일 선생의 만주 항일투쟁 발자취를 추적해 '독립운동으로 쓰러진 한 명가의 슬픈 이야기'와 '순국지사 권기일과 후손의 고난'이라는 책을 잇따라 발간한 김희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은 이렇게 말했다.

100년 전 일제에 항거해 독립운동에 나섰다가 한순간에 무너져 버린 추산의 가문은 이대로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만 하는가. 친일 기득권과 자본의 논리에 역사의 정의가 신음할 수밖에 없다면 앞으로 닥쳐올 역사는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김 관장은 바로 이것이야말로 추산의 가문뿐 아니라 100년 전 만주 항일지사들의 후손들에 대해 우리가 관심을 보이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분명한 이유라고 역설하고 있다.

◆천석 거부의 아들은 평생 간장 행상

만주벌판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추산의 외동아들 형순의 일생은 비극이었다. 해방과 동시에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만주에서의 고단한 삶은 고향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무일푼의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나선 게 간장 행상. 장사라고는 처음이니 단골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처음엔 리어카를 끌고 도만 당시 해방시킨 집안 노비들을 찾아다니며 부탁했다. 그러니 이전엔 하대하던 노비와 소작인들에게 도리어 존대를 해야 하는 기막힌 입장이 돼 버렸다. 삼천 석 거부의 양반집 종손 입에서 '간장 사세요'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 그냥 북을 치고 다녔다. 양반 체면은 옛말이 됐다. '둥둥 둥두둥….' 1970년대 초까지 간장 장수를 한 형순의 북소리는 서울까지도 들렸던 모양이다. 1969년 당시 신동아 8월호는 '행상하는 부창부수, 간장 장수 권형순'이라는 제목으로 독립운동 10년 만에 천석 가산 다 털고 변두리 초가집 방 한 칸을 사글세로 얻어 근근이 살아가는 형순 부부의 간장기 밴 기막힌 사연을 자세하게도 적어두고 있다.

비록 간장 행상으로 어렵게 살았지만 그는 틈나는 대로 어머니 김성과 함께 부친인 추산의 만주 독립운동 발자취를 글로 남기는 선부군유사(先府君遺事)를 썼다. 아버지 추산이 어떻게 최후를 마쳤고, 어디서 무엇을 했으며, 뭣 때문에 가산을 모두 없애야 했는지를 소상하게 적은 내용이다. 선친의 항일운동에 대해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해도 자신이 죽은 뒤 나중에라도 후손들에게만큼은 꼭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손자는 어릴 때부터 고된 머슴살이

형순의 고단한 삶은 그의 아들 대용(63'안동시 송현동) 씨에게도 그대로 이어진다. 당시 아버지의 간장 행상으로 근근이 사는 기막힌 가정 형편에 비춰 보면 대용 씨는 초등학교를 다 마친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입 하나라도 덜어야 하는 궁핍한 삶은 중학교 1학년 때 겨우 열세 살의 나이로 남의 집 머슴살이를 가게 만든다. 40명의 노비를 거느리던 대문중의 주손이 간장 행상에다 급기야 머슴으로까지 급전직하한 것이다. 당시 추산의 부인 김성은 주손이 될 손자를 머슴살이 보내면서 땅바닥을 치며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군 복무를 마친 대용 씨는 1983년 15년 만에 개인택시 면허를 얻는다. 해방 이후 40여 년 만에 겨우 안정된 최저 생계 대책이 마련되면서부터 문중의 주손으로서의 소임인 가문 재건에 나설 수가 있었다. 그러나 철저하게 망해 버린 탓에 자신의 노력이 매년 제자리걸음질만 치고 있어 한 해를 보내는 이즈음이면 애간장만 태운다.

할아버지 추산이 만주로 건너간 지 100주년인 올여름 그는 세 차례나 만주를 다녀왔다. 추산이 일군과 맞서다 최후의 1인이 된 신흥무관학교는 물론이고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대련 뤼순 감옥과 한인들이 모여 독립의 꿈을 다진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 마을과 독립군 예비부대 주둔지인 백서농장,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쓰러뜨린 하얼빈 역 구내, 생체실험으로 악명을 떨친 731부대 옛 터 등지를 둘러보며 숭고한 선열들의 애국정신에 고개 숙이고 일제의 만행에 치를 떨었다. 연변 이육사문학제를 위해 북간도에 갔을 땐 백두산에도 올랐다. 천지를 바라보며 가문 재건을 다짐하던 그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절규에 가까운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을 맴돈다.

"이제 저에게도 시간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평생 못다 하신 종가 재건을 저라도 꼭 이뤄내야 하는데, 그래야만 죽어 할아버지를 뵐 낯이 서는데…. 할아버지 생가라도 되찾았으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대일 배상금은 전액 '국가 재건'에

집 문서에다 토지 문서, 노비 문서를 다 내어 주고 독립운동에 목숨까지 바친 추산. 혹독한 고난의 길을 물려받은 후손들은 결코 선대를 원망하지 않았다. 비록 배는 주렸을지 몰라도 항상 당당했다. 해방 이후 기득권을 가진 친일파들의 득세에 내심 속상한 적도 없지 않았지만 그리 내색하지 않았다.

1961년 당시 '김종필-오히라 비밀협상'에서 한국-일본 양국은 대일 배상금 규모에 합의한다. 합의된 내용은 3억달러 무상원조에다 2억달러 공공차관, 1억달러 상업차관 등 총 6억달러다. 당시 대일 배상금에는 개인 청구권도 포함된 것은 물론이다. 이 때문에 항일지사들의 피값이기도 한 배상금은 포항제철을 세우고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추진하는 '국가 재건' 자금으로 전액 투입된다. 당시는 추산의 후손 간장장수 형순의 가세가 기울대로 기울어 결국 중학교를 못 다니게 된 맏아들이 남의 집 머슴살이를 가야 하던 때. 식구들 입에 풀칠도 할 수 없어 '종가 재건'은 엄두도 내지 못할 때다. 3년 후 1964년 김-오히라 비밀협상 메모각서가 알려지면서 굴욕외교라는 비판에 고교생까지 시위에 나설 정도로 전국적인 분노를 샀다.

하지만 형순과 그의 가족들은 당시 정부를 묵묵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어 1981년 5공 신군부 정권이 일본으로부터 40억달러의 차관을 제공받는다. 당시 나카소네 일본 총리가 5공 정부의 요청에 응하면서 성사된 것. 한반도 평화유지를 명분으로 했지만 결국 당시 일본 차관은 일제의 강점에 대한 간접 배상의 일환이었다. 이때도 추산의 아들 형순과 손자 대용 씨는 일본 차관에 대해 '정부의 일은 정부의 일일 뿐'이라며 혼자 힘으로 개인택시 면허를 따는 데만 열중했을 뿐이다. '좀 억울하지 않으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나라를 위해 일제와 싸운 게 무슨 보상이나 받으려고 한 것은 아니지 않으냐"며 언제나 '큰기침'으로 답하는 그는 비록 택시 핸들을 잡고 살지라도 항상 자신의 집안이 부자였다기보다 나라를 지키는 데 기꺼이 나선 명문가라는 자부심과 독립운동가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친일파들이 역사의 주류가 돼서야

"황금은 독립운동 벗을 좇아서 다 흩어졌고/ 백발은 세월이 바삐 흘러간 것을 놀라게 하네/ 미치도록 막다른 길에서 정말 통곡하고 싶지만/ 반드시 하늘이 개어 해가 다시 밝아지는 걸 보리라."

백하일기로 잘 알려진 독립지사 김대락은 허허벌판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지를 이렇게 표현하며 탄식했다. 힘의 논리가 국제적 질서를 창출하는 엄혹한 시기의 구한말 일제의 강점으로 나라를 잃게 되자 당시 양반과 선비 등 사회지도층인 사대부 집안들은 분연히 떨쳐 일어서 구국의 대열에 섰지만 그들의 고난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그렇지만 그들은 국내 친일파들처럼 일신의 안위를 위해 일제와의 타협을 일체 배격하고 혹독한 고난의 길을 스스로 택했다.

"한국 근대사의 비극 중 하나는 민족을 위해 몸 바친 인물과 친일분자들에 대한 평가가 뒤죽박죽인 오류를 들 수 있습니다. 독립운동가와 친일분자 후손들의 삶이 서로 극명하게 비교되는 것도 그러합니다. 정의가 승리하지 못한다는 사례를 남겨 역사의 바른길을 그릇되게 전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김희곤 관장은 추산 권기일 선생의 일대기를 쓴 책 서두에서 이렇게 탄식했다. 그는 "전쟁이나 혁명을 거치면서 전통적인 체제가 붕괴되고 새로운 주류가 형성되는 것이 역사의 일반적인 변화임에는 틀림없다"며 "하지만 나라를 강제로 빼앗은 일제에 협력한 친일 패거리들이 역사의 주류가 돼서야 말이 되는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서북으로 흑룡대원 남의 영절의/ 여러만만 현원자손 업어 기르고/ 동해섬중 어린 것들 품에다 품어/ 젓먹여 준 이가 뉘뇨/ 장백산밑 비단같은 만리낙원은/ 반만년래 피로 지킨 옛집이어늘/ 남의자식 놀이터로 내어 맡기고/ 종설움 받는 이가 뉘뇨/ 칼춤 추고 말을 달려 몸을 단련코/ 새로운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썩어가는 우리민족 이끌어 내어/ 새나라 세울 이가 뉘뇨.'

'심신을 단련시켜 어서 새 나라 세울 사람이 되자'는 내용의 신흥무관학교 교가이다. 100년 전 당시 목이 터져라 부르며 만주벌판에서 대한독립의 각오를 다지던 젊은 생도들의 노랫소리가 지금도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권동순기자 pinoky@msnet.co.kr

사진 강병두 사진작가 plmnb1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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