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좋은생각 행복편지 "괜찮아, 이 정도면 충분해"…임언미 대구문화 편집장

최근 지인들과의 모임에서 단체로 알츠하이머 검진을 받아보지 않겠느냐는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은 적이 있습니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여주인공이 나오는 드라마가 한창이기에 이런 이야기가 종종 화제에 오르곤 합니다. 마침 그날 모임의 구성원들이 비슷한 일을 하는 워킹맘들이기에 건망증으로 인한 작은 실수담들을 나누며 수다를 떨었습니다. 그러다 서로 건망증의 이유를 합리화하며 위안을 찾았습니다. 그만큼 신경 쓸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말이죠.

일상을 돌아보면 생각 없이 쳇바퀴를 바삐 돌리고 있는 다람쥐와 같습니다. 글을 쓰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따로 시간을 내서 공부를 할 시간은 좀처럼 나지 않습니다. 눈을 조금만 돌리면 찾을 수 있는 인문학 강의 프로그램을 수강해 보자는 것도 매번 계획만으로 끝이 납니다. 시간적 여유가 없음을 탓하며 스스로를 합리화하려 해도 하루 이틀입니다. 인터넷 사이트 철학 강좌를 신청해 짬짬이 들어보지만 꾸벅꾸벅 졸다 잠들어 버린 다음 날이면 스스로를 혐오하기까지도 합니다.

화려한 골드미스까지는 아니라도 싱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일상은 마냥 부러움의 대상입니다. 겉보기에 많이 채워놓은 것 같은 사람도 '더 채운 후 돌아오겠다'며 잠시 활동을 줄였다는 뉴스를 들으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도대체 나는 뭘까. 텅텅 빈 그릇의 모양새로 달그락거리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선녀와 나무꾼'의 선녀처럼 날개옷을 다시 찾아 입고 하늘로 훨훨 날아갈 수는 없을까. 양팔에 아이를 안고 남은 하나를 등에 업은 모양이 아니라 그냥 자유롭게 훨훨 말이죠.

그러다 왜 안 된다고만 생각했을까, 일단 떠나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조건 비행기 표부터 예약을 했습니다. 여행사에 '**행 왕복 표 1장'이라고 당당히 이야기하고 송금을 했습니다. 목적지는 지인이 살고 있는 가까운 아시아의 한 나라입니다. 주말을 끼우고 사흘 휴가를 내니 얼추 4박 5일의 일정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막상 떠나려고 하니 아이들은 왜 아플까요. 짐을 싸는 날 밤까지 죄책감이 엄습했습니다. '내가 도대체 뭘 잃었고 또 뭘 찾고자 하는 걸까?'

어쨌든 계획된 날은 왔고 일정대로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사무실일, 애들 걱정은 점점 작게 멀어지는 창밖 풍경처럼 마음에서 점점 멀어지더군요. 비행기가 구름 위를 나는 순간, 이미 마음은 현실을 떠나버렸습니다. 제 프로젝트를 알고 있던 친구가 해준 말이 맞았습니다. '비행기를 타면 모든 게 가벼워질 거야.'

숙소는 지인이 알고 있는 여행사에 부탁해서 예약을 했습니다. 이번 여행의 특이점이라면 그 도시에 관한 여행 책자 하나 챙기지 않았다는 겁니다. 미술관, 박물관 등 명소를 샅샅이 훑어보고 대표 음식을 반드시 먹고 돌아오겠다는 과거 싱글 시절 같은 계획도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저 일상이 아닌 곳의 공기와 자유를 맛보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지하철 노선도와 허접한 지도 한 장을 챙겨들고 무작정 길을 나섰습니다. 지인이 추천해 준 곳을 찾아가보기도 하고 수년 전 출장차 왔을 때 단체로 휙휙 지나쳤던 길을 다시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마치 20대 초반의 배낭여행객처럼 길거리 음식 하나를 사들고 쭈그리고 앉아 끼니를 때워 보기도 했습니다. 일상에서는 몇 달치 걸을 거리를 걷고 또 걸었습니다. 저녁에는 지인을 다시 만나 그 동네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맥주 한 잔 걸치는 것도 운치 있었습니다. 하하, 호호, 웃을 일도 아닌데 웃음이 났습니다.

금세 닷새가 지나갔고 다시 일상이 시작되었습니다. 딱히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채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카모메 식당의 여자들'처럼 더 멀리, 길게 도망가지도 못했고 당장 하던 일을 다 접고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몸과 마음이 많이 가벼워졌다는 것은 분명히 느낍니다.

지금 30, 40대를 건너는 여성들에게 일상은 11월의 날씨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햇살이 비치면 더없이 따스하다가도 구름이 가리면 뼛속까지 시린 겨울 같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어느 가수의 노래 가사에 기대 이 시절을 건너가려 합니다. '괜찮아, 이 정도면 충분해.' 툭툭, 어깨를 두드리는 정도의 일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따스할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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