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화국 말기 주한국 일본공사를 지낸 다니노 사쿠타로 씨의 일화다. 이임하던 1987년 2월, 그는 서울 주재 일본 특파원 전원과 대사관 관계자들에게 이듬해 서울올림픽 때까지 예상되는 한국 정치의 시나리오를 써 달라고 부탁했다. 서울올림픽 개막일에 개봉, 가장 정답에 가까운 이에게 상품을 보내겠다고 했다. 그러나 개봉한 결과 상품을 보낼 가치가 있는 답변을 쓴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모두 크게 빗나갔다. 선물을 보내겠다고 약속한 터라 골프로 비유하자면 첫 타로 어떻게든 그린에 올린 사람은 없는지 찾아보았지만 이마저 해당자가 없었다.
모두의 예상 답변이 크게 빗나간 원인은 6'29 민주화 선언 때문이었다. 당시 김대중 씨의 사면 복권을 예상한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초기 전망이 어긋나면 그 후의 예상 줄거리는 당연히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한국의 정치 사회를 민주화로 향해 뱃머리를 돌리게 한 6'29선언은 상상 밖의 돌풍이었다. 일기당천의 베테랑들조차 변화의 징조를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정치가 생물이라는 말을 실감 나게 하는 일화다.
정치 상황의 변화와 그 속에서 맡게 될 특정 개인의 역할은 어떻게 진전될지 알 수 없다. 혜성같이 떠오른 신데렐라를 향한 열광 뒤에는 하루아침에 거덜난 이의 쓸쓸한 퇴장이 오버랩된다. 국민들은 저마다 내년 선거 결과를 예상한다. 그러나 자신의 예측이 실현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선을 예상한 이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당시 막강했던 한나라당 후보를 쉽게 제쳤다. 2002년 겨울의 개표 날 저녁, 한나라당사에 진을 쳤던 방송사 촬영 차와 기자들은 개표 시작 한 시간도 안 돼 서둘러 민주당으로 옮겨 갔다. 뚜껑을 열자마자 예상이 빗나갔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당선은 그해 봄 월드컵에서 감지됐다. 젊은 층을 주축으로 온 국민이 함께 외친 대-한민국의 함성 속에 변화의 징조들이 잠재했다. 국민의 열망이 함께 합쳐지면 세상이 변한다는 암시였다. 사람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사이에 변화의 물줄기는 이미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성공한 사람만이 세상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나와 비슷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새로운 흐름이었다.
내년 선거에서 누가 살아남고 누가 사라질 것인가를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그러나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흐름에 순행하는 사람이 살아남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10년 전 보였던 한국 사회의 변화 잠재력은 이제 표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국민들은 더 이상 자유를 유보하지 않는다. 어리숙하지도 않다. 가난하고 많이 배우지 않았더라도 순순히 잘난 사람에게 장단을 맞추려고 않는다.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의 미래는 국민적 관심사다. 대세론의 주인공답게 여전히 그는 강자다. 그러나 변화의 시대, 강자의 자리는 적도 많다. 여당 내에서도 대세론의 위험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적잖다. 국민들은 나와 동떨어진 삶을 사는 강자를 원하지 않는다. 감동이 배제된 대세론은 희망 사항이다. 그를 둘러싼 이른바 친박 세력은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 세력이 없어서도 안 되지만 지지 세력이 자신을 칠 수도 있다. 패거리 정치, 갈라먹기 정치에 신물 난 국민들이 지금 그와 그의 주변을 지켜보고 있다.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는 "당 개혁의 출발은 잘난 사람을 좀 줄이는 것"이라고 했다. 명쾌한 답이지만 실천은 미지수다. 김문수 경기지사는 한 술 더 뜬다. "사람을 모으려면 먼저 아랫목을 비워 놓아야 한다"며 "영남이나 서울 강남에서 적어도 60~70석은 싹 비우고 외부 인사를 모셔와야 한다"고 제안한다.
인간의 역사는 자유를 쟁취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한국 정치의 물줄기는 정치 경제 모든 분야에서 시민의 자유가 커지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자유는 개인의 몫을 요구하는 동시에 앞선 사람들의 의무와 책임을 요구한다. 사람들의 마음은 비슷하다. 잘난 사람끼리의 세상을 바라지 않는다. 오늘 한국 정치에 대한 불신과 외면은 여기서 비롯된다. 내년 봄과 겨울,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지만 변화의 흐름에 순행한 이의 웃음을 보게 될 것은 분명하다. 시민들의 열망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그가 가질 자리가 없다.
徐泳瓘/논설주간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