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황금들판을 만났다. 잘 익은 벼들이 건들마에 출렁이고 있었다. 나의 의식은 바로 고향으로 달려간다. 어린 소년으로 다시 태어나 서툰 낫질을 하다 손가락을 베이고 논둑에 앉아 새참을 먹으며 이마에 밴 땀을 훔치기도 한다.
그날 밤 메뚜기(locust)를 잡는 꿈을 꾸었다. 뒷배미 논에서 손잡이가 짧은 채집망으로 잡은 놈들을 강아지풀 꿰미에 꿰어 들고 다니다가 나중엔 한데 묶어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 그러다가 자꾸만 숫자가 불어나 주체할 수가 없게 되자 갑자기 화면이 바뀌면서 메뚜기 떼가 사막의 모래바람처럼 몰려와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메뚜기들의 공격을 피하려고 양팔을 휘저으며 헛소리를 하다 말고 잠에서 깨어나니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황금들판이 고향의 추억을 불러와 메뚜기를 잡게 하더니 끝내 펄벅의 소설 '대지'에 나오는 중국 대륙의 벌판에서 메뚜기 떼의 습격을 받고 말았다. 작가는 "메뚜기 떼는 남쪽 하늘에 검은 구름처럼 지평선 위에 걸려 있더니 이윽고 부채꼴로 퍼지면서 하늘을 뒤덮었다. 세상이 온통 밤처럼 캄캄해지고 메뚜기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그들이 내려앉은 곳은 잎사귀는 볼 수 없고 졸지에 황무지로 돌변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흘러가는 무의식 같은 의식이 지배하는 시간여행은 참으로 재미있다. 시공의 제약을 받지 않으니 가히 종횡무진이다. 꿈을 꾸고 나니 갑자기 메뚜기볶음이 먹고 싶었다. 연전에 새벽시장 난전에서 메뚜기를 팔러 나온 시골 아낙의 모습을 본 것 같은 기억이 떠올라 아내를 채근하여 몇 번이나 나가 보았지만 허탕만 치고 말았다.
요즘 새벽시장에 반짝하고 나왔다 사라지는 메뚜기는 금값이다. 작은 됫박 하나에 일금 4만~5만원이니 마리당 가격이 100~200원 정도다. 그렇다고 농약을 뿌리지 않는 유기농 벼단지를 찾아가 직접 잡을 수는 없는 형편이고 보면 꼭 맛을 봐야 한다면 비싼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천재 작가 전혜린의 산문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작가는 독일에 부임하러 온 외교관을 마중하기 위해 장미 한 다발을 들고 공항으로 나간다. 그는 장미를 받아 가슴에 한 번 안아보고는 "이걸 우리 집으로 좀 보내줘요"하고는 총총히 떠난다. 그녀는 그 길로 우체국으로 달려가 꽃을 서울로 부친다. 도착했을 땐 드라이플라워가 되어 있었다.
젊은 날 이 글을 읽고 '세상에 이렇게 멋진 사람들도 있는가'하고 감탄한 적이 있다. 집으로 보내달라는 사람도, 그걸 곧이곧대로 보내는 사람도 모두가 멋쟁이다. 나도 이런 멋을 부려가며 인생을 살고 싶었지만 부덕의 소치로 멋 한 번 부려 보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경기도 양평에서 텃밭 가꾸는 재미에 푹 빠져 있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집사람은 메뚜기 잡으러 갔고 나는 고구마를 캐고 있어. 택배로 좀 보내줄게." "고구마는 놔두고 메뚜기만 보내. 안 그래도 메뚜기가 먹고 싶어 새벽시장에 나가 봤지만 못 샀어." 다음날 택배 아저씨와 문자 메시지가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메뚜기는 마누라가 잡은 거고, 밤은 주운 거고, 고구마는 심은 거야. 잘 먹어."
혼자서 메뚜기의 날개를 떼어내고 뒷다리 톱날 부위를 제거하는 등 한참 동안 부산을 떨었다. 초벌구이가 된 놈들을 포도씨 기름으로 볶다가 소금 간을 한 후 참기름을 두르니 최고급 술안주가 되었다. 아까워서 몇 마리만 맛보고 꽁꽁 묶어 싸두었다.
백암산 백양사 단풍맞이 트레킹이 이틀 뒤에 예정되어 있었다. 우리 부부는 영천굴 코스를 돌아 계곡의 너럭바위 위에 점심상을 차렸다. 내 눈에는 메뚜기볶음 요리와 와인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잔을 들기 전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기 백양사 계곡인데 메뚜기 안주로 술 한잔 하네, 고마워." "택배 보내고 나니 냉장고 안에 전에 잡아 뒀던 메뚜기가 또 있데, 마저 보내 줄게."
세상은 이렇게 아름답다. 장미 한 다발로 한껏 멋을 부릴 수도 있고, 이렇게 메뚜기 한 웅큼으로 행복의 나라로 갈 수 있으니. 메뚜기 천사의 아호는 '텅 비어 있다'는 범공(凡空)이다. 스님 아닌 스님이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