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만화는 어린이들의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재미있는 볼거리이다. 1960~80년대에 동네마다 하나씩은 있었던 만화방이 당시 어린이들로부터 큰 인기를 누리는 장소 중 하나였다. 흰 종이에 검은 잉크로 그려진 단순한 그림이지만, 그 안에 무궁무진한 상상의 세계를 품고 있는 만화에는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알 수 없는 힘이 있다. 그렇게 어린이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만화였지만, 어른들의 부정적인 시선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 시선은 만화가들에게도 마찬가지여서, 당시의 만화가들은 '망가쟁이'라고 낮잡아 불리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은 만화에 대한 인식이 놀라울 정도로 많이 바뀌었다. 출근길에 스마트폰으로 새로 업데이트된 인터넷 만화를 보는 직장인들이 적잖을 정도이니, 이제는 "애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이 만화나 보냐"라는 말을 꺼내기가 조금은 어색한 세상이 된 것 같다.
만화가들 역시 더 이상 망가쟁이가 아닌 대중예술가로서의 대우를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실력이 뛰어난 만화가들은 자신의 명성을 독자들에게뿐만 아니라 사회에 널리 각인시켰다. 허영만 화백의 경우가 그렇다. 군침이 돌 정도로 사실적으로 그려낸 한국의 전통 음식들, 그리고 정감 있는 이야기로 담백하게 꾸며진 그의 대표작 '식객'은 자신의 이름을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그려 넣은 계기가 되었다. 한국의 정서를 오롯이 담아낸 만화로, 연재한 작품마다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은 만화가 허영만. 다음은 어떤 작품으로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줄지 그의 행보가 기대된다.
허영만(許英萬)은 1947년 6월 26일 전라남도 여수 출생으로,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는 불행으로 가세가 기울어,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여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돈을 빨리 벌 수 있는 만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유명 만화가인 박문윤, 엄희자, 이향원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수학하고 1975년 '각시탈'을 발표, 만화계에 등단한다.
그의 본명은 허영만이 아니고 허형만이다. 무슨 이유로 개명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만화계에 등단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발표한 모든 작품에 허영만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영만이든 형만이든, 음운(音韻)은 토(土)와 수(水)로 똑같은 오행(五行)의 이름이다. 그에게는 편인(偏印)과 정재(正財)로 작용하니 부모 덕은 크게 없는 이름이지만, 말년에 재물을 많이 모을 수 있는 성격의 이름이다. 남자의 이름에 편인과 정재가 동주하면 그 성격이 강인하고 투철한 정신력으로 어떠한 사업도 능히 성공시킬 수 있으며, 사교성과 재성이 좋으므로 직장생활이나 사업을 해도 크게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성격의 이름이다.
만화가의 이름이라고 딱히 말할 수는 없지만, 만화가라는 직업 외에도 세계요트대회 홍보대사, 한국철도공사 홍보대사, 그의 이름을 딴 '허영만 와인'을 출시하고 홍보활동을 하는 등 열정적인 삶을 사는 그는, 틀림없는 그의 이름이 가진 성격 그대로이다. '식객'을 작업할 때에도 걸어서 또는 자전거를 타고 전국의 맛집을 찾아 다녔고, 칭기즈칸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구상할 때에도 몽골을 3번이나 방문하여, 탐험가의 정신으로 취재하며 책을 출간하였다. 만화가의 극존칭이라고 인식되는 화백으로 불리는 허영만, 그의 이름처럼 남다른 열정이 있었기에 불리기에 마땅한 호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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