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북의 혼] 제7부-세계 속의 경북정신 <1>실천적 지식인 최치원의 개혁정신

신분제 굴레 벗어나고자 당나라 유학…그는 운명을 스스로 개척했다

중국 양주시가 정한
중국 양주시가 정한 '최치원의 날'인 10월 15일. 양주 '당성유지' 내 최치원 기념관에서 경주 최씨 후손들과 양주시 관계자, 양주예술학교 학생 등 200여 명이 모여 한중교류 10주년을 회고하는 기념식을 진행하고 있다.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첫 관직 생활을 한 남경시 율수현 박물관에 있는 당나라 시대 원형을 복원한 7층 영수탑의 모습.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첫 관직 생활을 한 남경시 율수현 박물관에 있는 당나라 시대 원형을 복원한 7층 영수탑의 모습.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고운 최치원 영정.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고운 최치원 영정.

신라인은 세계인이었다. 재능이 출중했고 꿈도 컸던 신라인들은 한반도에서 벗어나 대륙인 당나라로 진출해 능력을 맘껏 펼쳤다. 그들은 바다와 국경이라는 경계를 건너 신분과 공간이라는 한계를 넘어섰다.

최치원은 골품제라는 신분제의 한계에 맞서 불과 12세의 나이에 바다를 건넜다. '해상왕' 장보고 역시 평민이라는 신분 제약을 넘고자 기회의 땅인 당나라로 진출했다. 목숨을 걸 만큼 험난한 뱃길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구법승 혜초는 지금의 인도를 지나 이란까지 오직 두 다리로 40개가 넘는 나라들을 순례했다. 죽음을 각오한 여행이었다.

시대의 한계와 제약을 세계 진출로 극복하려 했던 신라인들의 도전과 개척정신을 세 차례에 걸쳐 조명해 본다.

지난달 14일 중국 남경시에서 38㎞ 떨어진 인구 40만의 작은 도시인 율수현(1천67㎢)의 박물관. 입구를 들어서면 당나라 시대 원형을 복원한 7층 영수탑이 서 있다. 개방된 탑 내부로 들어가면 액자에 담긴 최치원의 시가 벽에 걸려 있다. 탑을 나와 20여m 걸어가면 최치원 동상이 서 있다. 율수는 최치원이 첫 관직생활을 했던 곳이다. 이를 기리기 위해 2000년 한중 최치원 기념사업회가 동상을 세웠고 중국 당국도 기꺼이 동참했다.

율수현 박물관 장평앙(張平昻) 관리인은 "박물관은 당나라 시대 옛 관아를 복원했다. 이곳 중국 사람들은 물론 한국 사람들도 찾아와 최치원 동상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간다"고 했다.

남경사범대학 한중문화연구센터 당은평(黨銀平) 박사는 "최치원은 통일신라 시기의 가장 걸출한 인재이자 학자, 문학가이며 또한 한국 고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문화 인사 중 한 사람이다"고 평가했다.

최치원은 붓 하나로 당나라에서 이름을 떨치고 신라로 돌아와 사회개혁을 모색했던 신라 말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난세에 빛을 발한 재능

868년 최견일은 당 유학 뱃길에 오르던 12세 아들 치원에게 "10년 공부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 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렀다. 아들은 각고의 노력 끝에 유학 6년 만인 18세(874년) 때 빈공과(賓貢科) 과거 시험에 급제했다.

신라는 엄격한 골품제 사회였다. 꿈의 크기도 신분에 따라 제약됐다. 신라사회는 극심한 왕위쟁탈과 귀족들의 사치와 방탕으로 혼란을 겪던 터였다. 반면 당나라는 외국인에게도 관직의 문이 열려 있고 능력에 따라 높은 지위에 오를 수도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육두품 집안으로 한계를 느낀 아버지는 어린 치원이 더 넓은 세상에서 큰 꿈을 펼치길 바랐다.

많은 유학생들이 모여든 당나라에서 최치원은 876년 약관 20세에 첫 관직(율수현위)에 오를 만큼 학문이 출중했다. 최치원은 자신의 능력을 가리켜 "짧은 두레박줄은 깊은 우물물을 길을 수 없고 무딘 창은 굳은 것을 뚫을 수 없습니다"라며 겸손했지만, 재능은 난세에 빛을 발했다.

최치원은 879년부터 양주에서 '황소(黃巢)의 난' 토벌군 사령관인 고변(高騈)의 문서사무를 책임지는 종사관으로 복무했다. 고변은 최치원의 식견과 문장에 매료돼 모든 문서를 직보(直報)하도록 배려했다. 다섯 개의 직첩이 동시에 주어질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황소가 수도인 장안까지 점령한 881년. 최치원은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당나라 전역에 알리는 '격황소서'(檄黃巢書)를 지었다. 훗날 고려의 이규보는 "황소가 격문을 읽다가 '온 천하 사람이 너를 드러내놓고 죽이려 할 뿐 아니라, 아마 지하의 귀신들까지 쥐도 새도 모르게 너를 죽이려 이미 의논했을 것'이라는 구절에서 너무 놀라 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고 한다"며 칭송했다.

당시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황소를 격퇴한 것은 칼이 아니라 최치원의 글이다'라는 이야기가 떠돌았을 정도로 최치원의 글 솜씨는 당나라 전체를 뒤흔들었다.

882년 당 황제가 '자금어대'(紫金魚袋'정5품 이상에게만 주는 붉은 주머니)를 하사할 만큼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최치원은 귀국을 결심한다.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아버지의 병환 때문이었다. 884년 7월에 황소가 토벌되고 당 희종(僖宗)의 재가를 얻어 그해 8월 당나라 사신 자격으로 귀국길에 오른다.

◆'닫힌 사회' 신라를 향한 '직언'(直言)

28세 청년이 되어 16년 만에 돌아온 최치원에게 신라는 냉담했다. 헌강왕은 최치원에게 경서(經書)를 강의하는 시독과 국서를 작성하는 한림학사를 맡겼지만 포부를 펼칠 수 있는 직위는 아니었다. 중앙부처나 군부대 등 요직은 진골 출신이 차지했다.

최치원은 신라 진골들에게 눈엣가시였다. 육두품인 최치원은 과거라는 인재등용 시험에 합격해 관직을 누리고 당나라 임금에게 인정받았다. 이런 최치원의 존재는 혈통만으로 출세가 보장된 진골들에게 불안감을 주었던 것.

최치원은 894년 2월 신라사회 개혁안인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진성여왕에게 올린다. 구국의 직언이었다. 내용은 전하지 않지만 학자들은 '신라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골품제를 완화하고 과거제에 의한 인재등용을 하라는 건의 등이 피력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하현강 )

건의는 묵살됐다. 진골 귀족들의 반발과 비난이 들끓었다. 훗날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십여조를 여왕에게 간했으나 여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연암집, 함양학사루기)며 안타까워 했다.

최치원은 고발을 멈추지 않았다. "사람 죽이기를 마치 칼로 삼대를 베는 듯하고 땅 위에 드러난 백골은 잡초처럼 버려졌으며…백성들이 신열이 나도 물로 씻어줄 수 없고 물에 빠졌어도 건져줄 수 없다. 모든 국고와 창고는 한결같이 비어 있고 나루로 통하는 길은 사방으로 막혀 있다."

중국 중앙민족대학 이정찬 박사는 "최치원은 능력으로 인정받았던 당에서의 활동을 통해 신라사회 신분제의 폐쇄성을 절실하게 느꼈다"며 "그래서 선진문화에 대한 갈구와 신라 사회변화에 대한 욕구가 누구보다 강했다"고 설명했다.

최치원은 결국 898년 42세에 벼슬을 떠나 가야산으로 들어갔다. 자발적인 은둔이 아니라 신라개혁에 반발한 진골 세력에 의한 축출이었다.

개혁을 거부했던 천년 왕국 신라는 역사의 뒤안길로 점점 사라져갔다.

◆좌절은 새 시대의 밑거름이 되어

청운의 꿈을 펼친 당나라와 천년 왕국인 모국 신라가 망국으로 빠져들던 혼란의 시대 한가운데에 최치원이 있었다.

그는 끝까지 사회현실에서 눈을 떼지 않았던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벼슬에서 물러 난 뒤에도 산에서 연구 활동에 매진하면서 불교관련 저술을 이어갔다. 후학 교육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국토순례를 통해 전란으로 피폐된 산천과 백성들의 삶을 직시했다.

이러한 최치원의 실천은 당대엔 좌절했지만 훗날 새로운 고려왕조에서 실현됐다. 왕건의 골품 초월정책, 광종의 과거제도, 성종의 유학 장려책, 최승로의 '시무(時務) 28조'를 통해 최치원의 정신은 계승된다. 고려 현종 때 문묘에 신주가 놓이고 문창후(文昌候)로 추대될 만큼 후세에 존경 받았다.

한국전통문화학교 전통교양교육원 최영성 교수는 "최치원은 당대를 대표하는 최고 지성인의 한 사람이었으며 '나말여초'라는 역사적 전환기의 정치적 사상적 변화를 대변한 시대정신의 산 증인이었다"고 평가했다.

중국에서 서광호기자 kozmo@msnet.co.kr

-857년 서라벌(경주) 출생

-868년 당나라에 유학길에 오름

-874년 빈공과(賓貢科) 급제

-876년 선주(宣州)의 율수현위(漂水縣尉)가 됨

-881년 황소의 난을 겪으며 격황소서(檄黃巢書)를 지음

-884년 8월 귀국길에 오름

-885년 신라 헌강왕 11년 귀국해 시독겸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에 임명됨

-886년 헌강왕 죽고 기득권 세력인 진골의 견제로 지방직을 전전함

-894년 진성여왕에게 시무책십여조를 올려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고자 함

-899년 42살 관직을 모두 버리고 전국 곳곳을 순례하면서 저술활동과 후학교육에 힘씀

-만년에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친 것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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