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칼럼] 아버지의 자리

살다 보면 다시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상처가 있다. 이십대 중반 이후, 추수를 끝낸 가을들판처럼 늘 비어 있는 아버지의 자리가 그렇다. 가난한 시골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며 화가가 되겠다는 마법에 걸려들었을 때 아버지의 반대는 단호했다. 현실의 바닥까지 내려가 몸부림을 쳐도 살아가기 힘든 시절이었으니, 예술을 하겠다는 둘째 아들의 험난한 미래는 보나마나 였을 것이다. 그래서 반대하는 아버지와 반항하는 아들 사이의 갈등은 커질 수밖에 없었고 대화는 끊어졌다.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먼저 보여드린 후 죄송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급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떠나시는 바람에 끝내 화해의 날은 오지 않았다. 불편하게 흘려보낸 아쉬움과 갈등의 파편들이 한꺼번에 가슴에 와 박히는 끔찍한 고통을 그때 겪었다. 그리움과 아픔은 추억이 되지 못하고, 딸아이가 중학생이 되어 사춘기에 접어들자 크고 작은 갈등이 생기더니 순식간에 대화가 뚝 끊겨버리면서 악몽처럼 되살아났다.

그래서 아이와 소통을 위해 찾아낸 방법이 여행이었다. 대화할 기회가 늘어나고 시간과 장소를 공유하노라면 세월이 흘러도 좋은 추억은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께 여행을 가는 날에는 평소 한산하던 고속도로가 갑자기 정체되거나, 엔진고장으로 견인차 신세를 지는 등 징크스가 습관처럼 따라붙었다. 당연히 아이의 입장에서는 아빠에 대한 부정적인 확신만 키웠다. 특히 우리의 여행이 끝내 웃음으로 기억되지 못한 결정적인 사건은 요즘처럼 가을이 깊어갈 무렵 경주 석굴암에 갔을 때였다. 겨우겨우 아이를 설득해 강아지까지 데리고 석굴암 주차장에 도착해 매표소 앞에 선 순간, 애완견 출입금지라는 충격적인 말부터 들어야 했다. 말이 강아지일 뿐 주머니에 넣어도 들어갈 정도였는데도 관리소 직원의 입장은 단호했다. 딸아이의 표정은 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납덩이가 되어 있었고, 다른 어떤 대안도 싫다며 무조건 집으로 되돌아가기만을 원했다.

대구로 돌아오는 내내 우리는 짧은 단어 하나 섞어보지 못했다. 지난날 아버지와 나처럼, 나와 아이는 자꾸 먼 곳으로 떠내려갔다. 그러나 그날까지 침묵한다면 기회는 더 멀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굳어 있는 아이의 얼굴을 보며 할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그래서 왜 갑자기 아빠가 여행에 집착했었는지를 설명하고 그것 때문에 결국 더 나빠진 상황까지 이르고만 슬픔도 말했다. 그 와중에 아이가 울고 나도 아버지로서의 체면도 잊고 눈물을 쏟았다.

사람과 사물을 사랑하는 마음은 좋아하는 감정보다 더 깊고 근원적이다. 좋은 것은 기호와 상황에 따라서 싫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과 미움은 칼날을 잡느냐, 손잡이를 쥐느냐의 차이일 뿐 같은 뿌리에서 나온 하나의 감정이다. 자식에 대한 마음이 특히 그렇다. 나는 아버지의 질책 속에 담긴 사랑을 읽지 못했고, 그 사실을 아이에게는 어떻게든 반복시키고 싶지 않았다는 뜻을 그렇게 멋없이 전했다. 그래도 그날 이후 우리는 함께 여행을 다녀도 징크스 자체를 재미있어 하며 친구처럼 지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동화처럼 우리의 관계가 내가 바라던 쪽으로만 흘러간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에 올라와 아버지를 따라서 회화를 전공하겠다고 준비를 해온 아이는 수능시험을 불과 몇 주 앞두고 전격적으로 진로를 바꾸겠다고 선언을 했다. 그날 나를 바라보던 눈빛 속에는 지난날 느닷없이 화가가 되겠다고 우기던 바로 내가 있었다. 게다가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부터 하는 아버지가 되기보다는, 지금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하는 것이 더 옳다고 밀고 나간 것도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이었다. 아버지에게 드린 상처를 아버지가 되어 되돌려받는구나 하고 스쳐가던 서늘한 마음을 감추고 아이에게 편지를 썼다. 무슨 결정을 하든 진실로 하고 싶은 것이라면 가장 믿어주고 응원해 주는 사람이 아버지였으면 한다고 적었다.

온 산과 들에 또 한 번의 가을 잎이 지고 있다. 모든 것이 떠나는 시점이자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농부가 그렇고, 수능을 치른 모든 수험생들과 부모들의 마음도 그럴 것이다. 이 가을의 끝에 서서 내 가슴에 비어 있는 아버지의 자리와 아이의 마음속에 채워 주어야 할 아버지의 자리를 새삼 생각해 본다.

이영철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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