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퀼리브리엄'에서는 감정이 없는 로봇 같은 사람들의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지배자들은 예술작품이 인간의 감정을 증폭시켜 욕망과 시기, 분노 등을 만들어내며 인류를 멸망의 위기로 몰고 간다며 보이는 대로 작품들을 없애버린다. 하지만 결국 이들을 사람답게 돌아오게 한 것은 예술이었다. 이 영화는 예술에 담긴 메시지는 바로 '인간'임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은 밥만 먹고 살 수 없는 동물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도 있어야 하고, 능력도 인정도 받아야 하고, 음악을 듣고 미술도 즐기는 등 예술도 향유해야 한다. 하지만 '문화생활'이라는 것이 서민들에게 쉬운 일은 아니다. 과거에 비해 다양한 공연, 전시 등이 생겨나고 있지만 서민들에겐 문턱이 높다. 소득 양극화와 함께 문화적 양극화도 심각해지고 있다.
◆문화생활? 일부 계층의 이야기?
조만간 공연할 한 뮤지컬 공연 티켓을 검색하던 황정현(42) 씨는 가격을 보고 한숨만 내쉴 수밖에 없었다.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이 된 딸아이가 하도 졸라 온가족이 연말연시 공연이라도 한번 봐야겠다고 큰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티켓 가격이 10만원을 훌쩍 넘어서니 4인 가족이 함께 공연을 즐기기에는 손이 바들바들 떨릴 수밖에 없었다. 황 씨는 "1층에서 관람을 하려면 적어도 VIP석이나 R석 티켓을 끊어야 하지만 가격이 11만~13만원에 달하니 공연 한번 보는데 50만~60만원이 드는 셈"이라며 "과연 우리나라 서민들 중 이런 공연을 1년에 한두 번이라도 서슴없이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그냥 관람을 단념하려고 하지만 딸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워낙 TV에 많은 광고를 해대는 탓에 학교에 가면 반 아이들이 너도나도 뮤지컬을 봤다면서 자랑을 하기 때문이다. 황 씨는 "유명 뮤지컬이 장기공연에 들어갈 경우 어른들도 마치 그걸 안 보면 뭔가 사회에 뒤처지는 느낌을 받을 정도인데, 아이들은 오죽하겠냐"며 "무리를 해서라도 티켓을 예매해야 할지 며칠 더 고민해야겠다"고 했다.
아이 셋을 키우고 있는 중소기업의 부장 박모(47) 씨는 올해 난생처음으로 온 가족이 공연장 나들이를 한번 해봤다. 그것도 무료로 배포되는 티켓을 통해서다. 박 씨는 "이렇게 해서라도 아이들에게 공연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줄 수 있어 좋았다"며 "잘 찾아보면 저렴한 공연도 꽤 많다고 이야기는 하는데 아이 셋 키우는 게 전쟁이라 그런 정보를 검색하고 있을 여유도 사실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박 씨가 즐기는 문화생활이라고 해야 고작해야 영화 관람. 하지만 이마저도 온가족이 한 번 영화관 나들이를 하면 관람료만 5만원에 달하는 경우가 있고 여기에다 식사까지 하려면 10만원은 훌쩍 넘어버리는 현실이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공연 관람료는 이미 수년 전부터 논란이 되고 있다. 조금 이름이 알려진 공연은 가격이 10만원을 훌쩍 넘기 일쑤고, 콘서트 역시 가격대가 10만원에 육박한다. 소극장 연극은 2만5천~3만원 선으로 상대적으로 싸지만 이 역시 서민 가정에는 적잖은 부담이다. 그나마 대구경북은 공연 가격이 서울과 수도권에 비해 싼 편이다. 서울에서 이름난 오페라 한 편을 관람하려면 30만원을 넘어서는 경우도 흔하다.
◆저소득층 지원 프로그램
대구문화재단은 문화바우처 사업의 하나로 바우처 카드를 이용하기 힘든 대상자들을 위한 기획사업을 펼치고 있다. 객석 기부와 할인을 받아 공연티켓을 제공하는 '해피티켓'과 대상자들에게 이동수단을 제공해 문화공연장으로 데려다주는 서비스인 '해피버스', 문화예술인 및 단체의 재능기부를 받아 문화취약계층을 찾아가 공연하는 '해피핸즈'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올해 대구문화바우처 기획사업에는 3억3천700만원의 예산이 투입됐으며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누렸다. 구체적 내용을 보면 ▷해피티켓 44개 프로그램(63회) 4천995명 ▷해피핸즈 14개 프로그램(46회) 4천364명 ▷해피버스 75회 2천394명 등이다.
또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문화바우처 사업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문화예술 활동에 제약을 받는 기초생활수급자, 법정차상위계층에게 공연, 전시, 영화, 도서 등 문화예술 프로그램의 관람료 및 CD, 도서 구입비를 지원하고 있다. 올해부터는 예전보다 사용방법이 훨씬 간편해져 문화바우처 홈페이지나 거주지 읍'면'동사무소에 신청하면 발급되는 카드를 통해 원하는 프로그램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용 금액은 가구당 5만원씩. 하지만 청소년(10~19세) 수에 따라 1인당 5만원씩 추가 지급되기 때문에 가구당 최대 35만원까지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적은 금액이긴 하지만 문화에 목마른 저소득층에게는 단비와도 같은 지원책이다. 올해 대구에서는 모두 16억3천800만원의 예산이 투입돼 지난 10월 말 현재 2만2천807명이 카드를 발급받았다. 문화카드는 문화바우처 홈페이지나 거주지 읍'면'동 주민센터에서 신청할 수 있다.
문화적 불평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아지면서 기부를 아예 티켓으로 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영화나 공연, 전시 티켓을 기부해 저소득층의 문화적 소외감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따르면 지난해에는 11건 1천400만원에 불과했던 기부가 올해는 19건 7천만원 상당으로 증가 추세에 있다.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 김종원 홍보담당자는 "일부 공연 기획사의 경우에는 아예 객석의 일정 물량을 사회적 배려계층을 위해 내주고 있으며, 영화관 등도 영화 티켓을 통한 기부를 많이 하고 있다"며 "또 문화예술을 좋아하는 기부자들은 자신이 직접 티켓을 사서 기부하는 경우도 있다"고 밝혔다.
◆서민대상 저렴한 공연도 확대돼야
저소득층에 대한 문화 지원 예산은 갈수록 증가하고 있지만, 서민들은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저소득층은 아니지만 비싼 티켓 가격에 공연 관람이 쉽지 않다. 게다가 저렴한 공연은 볼만한 것이 거의 없고, 유명한 공연은 가격이 비싸 엄두를 못 내는 형편이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각 지역마다 산재해 있는 구립'시립 공연장의 작품 수준을 끌어올리고, 대관에 치중하기보다는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양질의 공연을 제공해 본래의 목적에 맞는 시민들의 문화접근성 향상에 기여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중 가장 성공한 사례로 꼽히는 바로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천원의 행복' 공연이다. 사실 1천원이라는 것은 상징적인 가격이다. 공연을 즐기려는 마음만 있다면 언제든지 가격 부담없이 가뿐하게 공연장의 문턱을 넘을 수 있게끔 한 것이다. 서민들에게 익숙지 않은 클래식, 발레, 오페라, 재즈 등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맛볼 수 있다. 세종문화회관은 '천원의 행복'은 대부분 공연장들이 공연을 쉬는 매월 마지막 주 월요일에 맞춰 다른 공연장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했다. 세종문화회관의 무모했던 실험이 성공적으로 평가받으면서 이제 '천원의 행복'은 부산 해운대문화회관, 대전 문화예술의전당 등에서도 시행중이다.
대구에서는 직장인들을 위한 '우리회사 공연보러 가는 날'(이하 우'공'날)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오는 12월 6일 북대구세무서 직원 10여 명은 봉산문화회관에서 연극 '라이어'를 관람하는 것으로 송년회를 대신한다. 우'공'날을 통해 40% 저렴한 가격에 예매한 것. 박운석 대구문화재단 기획팀장은 "좋은 공연을 저렴한 가격에 단체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줌으로써 음주 회식이 아닌 문화 회식 분위기를 확산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금동엽 전 동구문화체육회관장은 "시민들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문화가 아니라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가 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고민과 실험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사회적 양극화 심화로 문화적 불평등도 가속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부의 문화바우처 확대 등의 대책과 함께 이것이 양적 팽창뿐 아니라 실질적인 문화향유 계층의 확대로 이어지도록 하는 방안이 모색돼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김세환 "아들 잘 부탁"…선관위, 면접위원까지 교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