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휴가에 처가 식구들과 경주를 다녀왔다. 평소 약주를 좋아하시는 장인어른께 자주 술을 사다드리지 못했던 차에 함께 할 수 있어 좋은 시간이었다. 밤이 되어 술이 몇 순배 돌자 자연스레 세상사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삼성을 비롯한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경영권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온갖 편법을 동원하고 불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해서 회사돈을 자기 돈처럼 사용하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에 대해 문제 삼았다. 한참을 들으시던 장인어른은 규구(規矩)와 방원(方圓)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아마 나의 말이 너무 치우쳐 보여서 '자네 말은 너무 모 나네' 라는 말씀을 사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셨던 것 같다.
규(規)는 원(圓)을 그리는 컴퍼스를 이르는 말이고 구(矩)는 사각형(方)을 그리는 곱자를 일컫는 말이다. 규구(規矩)를 함께하여 방원(方圓)을 그려낼 수 있었다. 규구로 사방을 정하니 우주는 원래 모든 선과 악, 좋음과 나쁨을 상호 제어하는 표준이 있었다.
도(度)이든 양(量)이든 혹은 형(衡)이든 그 한도가 있다. 규구를 통해 방원이 어떠해야 하는지 일러준 것이다.(規矩는 方圓之至也요)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법을 일러 준 것이리라.
행여 내가 규구의 미덕을 벗어나 모자랄까봐 걱정이 되셨던 게다. 나는 장인어른의 고마운 가르침 속에서 우리나라의 현실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었다. 아무리 봐도 우리나라는 너무 지나치다.
우리나라가 70, 80년대 경제성장에 몰두할 때 환경은 뒷전이었다. 환경을 생각하면서 회사를 운영하면 회사를 제대로 운영할 수가 없다고 했다. 결국 산업화 과정에서 우리 산하(山河)는 골병이 들 대로 들었다. 구미와 울산같이 대규모 공단이 있는 지역은 그야말로 엉망이 되었다. 낙동강이 죽은 강이 된 것도 결국은 공단에서 흘러들어온 폐수 때문이었다. 경제를 살리자고 산천은 죽어갔고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고통받았다. 자연을 파괴하고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주면서 우리 경제는 성장해갔다. 경영진이 잘나서가 아니라 온 나라가 뒷받침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독일로 보내진 광부들과 간호사들의 임금을 담보로 차관을 들여와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청춘을 바쳐 독일로 떠난 이들 덕분에 마련된 그 돈으로 기업들의 물류를 담당할 고속도로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온 나라의 에너지를 경제성장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쏟아 부었다.
하지만 성장의 한계가 없었다. 일인당 국민 소득 1만달러만 되면 잘살 것 같이 이야기하더니 다시 2만달러 시대를 이야기한다. 이제는 4만달러 시대를 이야기한다. 먹고살 만해진 뒤에도 기업은 자신들이 버리고 죽인 것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파괴된 환경을 보고 기업은 침묵했고 시민들이 나서서 망가진 산하를 치유하도록 했다. 자신들의 방만한 경영으로 회사가 어려워지면 노동자를 탓하며 구조조정을 일삼아 평생을 헌신해 온 노동자들을 선진화라는 명목을 내세워 회사에서 내쫓았다.
40년 전부터 지금까지 줄곧 기업은 어렵다는 소리를 하며 우리 경제의 파이를 키워야 나라가 산다고 했다. 이제는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면 우리사회는 다 살기 좋아진다고 얘기한다. 초우량 기업이라고 하면서 여전히 힘들다고 하고 일자리를 늘리기는커녕 도리어 줄여나가서 청년 실업은 갈수록 늘어만 간다.
자신들만의 경쟁력을 확보하기보다 동네 가게에서 판매하는 치킨과 피자까지 직접 팔겠다고 나서서 서민들의 밥줄을 옥죄고 있다. 그러면서 자유시장경제에서 팔고 싶은 걸 파는데 무슨 문제냐고 말한다. 국가가 나서서 보호하고 도와주지 않았으면 성장하지 못했을 기업들이 이제는 자신이 잘나서 그리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제는 사회가 나서서 기업가들의 이 지나친 습성을 고쳐야 한다. 규구와 방원의 덕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기업가들에게 모자람의 미덕을 알려야 한다. 돌려줘야 할 때를 지나친 기업들에게 시민들이 한마음으로 외쳐야 한다. 당신들의 부는 우리의 것이라고.
지난 11월 9일. 35m 높이의 크레인 위에서 309일을 살며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된 노동자들의 문제 해결을 촉구했던 김진숙씨가 하늘 생활을 끝내고 내려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단 8분 만에 내려올 수 있는 길을 309일이 걸려 내려왔다. 내려왔다는 소식이 무엇보다 반가웠다. 영도조선소 노동자의 고통이 우리 사회의 고통이기에, 하늘 생활을 하는 이에게 마음 한편에 빚을 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사람은 죽어서 하늘과 땅의 이치를 깨닫는지 둥근 하늘을 덮고 네모난 관에 오늘도 누워 있다.
안재홍/대구녹색소비자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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