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이야기는 삶의 은유다

어렸을 때 잦은 병치레로 아이의 하루하루가 불안했다는 부모님은 나를 데리고 전국의 용한 병원은 물론 온 산 대찰(大刹)로 불공을 다니셨다. 덜컹덜컹 먼지가 보얗게 이는 시골길을 달리던 버스나 어디든 비슷하게 생긴 간이역의 작은 화단에 피었던 자잘한 꽃들, 가슴 위에 차갑게 올려지던 스테인리스 청진기, 단내처럼 코끝에 풍기던 환약 냄새가 오래된 그때 그 여행의 어렴풋한 기억들이다.

그 중 아무리 여러 번 이야기를 들었어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 있다. 윤달이 든 어느 해,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이 계신 삼사순례(三寺巡禮)를 위해 높은 산 너머까지 부모님이 나를 번갈아 업고 다니셨다는데 그 기억이 도통 나질 않는 것이다. 다만 어느 늦은 봄날, 동화사 대웅전에서 어머닐 따라 백팔배를 올릴 때 그 모습을 본 아주머니들이 바깥문을 둘러싸고 감탄하던 것에 우쭐해했던 기억은 난다. 어쩌면 이것도 그날을 기념하기 위해 절 입구 큰 바위에 나를 앉혀 찍은 사진 때문에 유추해낸 사후기억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부모님 말씀대로라면 유리질(琉璃質)인양 자칫 바스러질 것 같은 아이를 집안에 매어두려고 수많은 이야기를 내게 들려 주셨다고 한다. 그 중 알영부인이나 금으로 만든 자(金尺), 아사달과 아사녀 이야기를 특히 좋아해 틈만 나면 그 이야기만 계속 졸라댔다고도 하셨다. 박씨 부인이 남편에게 비루먹은 말을 사오게 해 적토마로 기른 이야기에서는 얼마나 열광하든지 한 달 내내 그 이야기만 조르더라며 웃곤 하셨다.

그때 함께 들은 옛 한일극장 정경(아버지는 늘 '키네마극장에서 가마니를 깔고 영화 볼 때'라고 하셨다)이나, 머리에 꽃을 꽂고 다녔다던 금달래에 얽힌 슬픈 이야기, 박작대기의 일화나 동네 공장주들의 흥망사, 대구십경(大邱十景) 등은 지금도 눈앞에 그려질 듯 생생하니 가히 당시의 나는 어린 이야기 중독자라고도 할 수 있었겠다.

그 후 글을 깨쳐 책을 읽게 되고 어쭙잖지만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모두 그로 촉발되었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다른 일들로 스토리텔링 관련 서적들을 뒤적이다가 로버트 맥기의 '이야기는 삶의 은유다'라는 말에 턱 걸려 옛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문득 낙엽도 우수수 지니 부모님 생각마저 간절해지기도 해서다.

박미영/시인, 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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