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진성인 이정과 안동 주촌의 뚝향나무

수많은 가지처럼 집안 번창, 귀중한 문화자료

안동시 와룡면 주하리의 진성 이씨 주촌종가(周村宗家'경상북도 민속자료 제72호)에는 여느 향나무와 달리 높이 3m 정도에서 줄기가 용이 승천하는 모습으로 뻗고, 가지가 수평으로 자라는 거대한 뚝향나무(천연기념물 제314호)가 있다.

소월의 '진달래꽃'의 무대인 평안북도 영변에서 가져온 것이다. 6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생명력이 왕성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심은 사람은 영변 판관(判官)을 지낸 진성인 이정(李禎) 선생이다.

공은 천성이 청렴하고 자질이 용맹하여 승마와 활쏘기에 능했다고 한다. 영변 판관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호랑이가 주민을 해치자 직접 굴을 찾아가서 단 한 발의 화살로 넘어뜨려 고을 사람들을 탄복하게 하였다고 한다.

1431년(세종 13) 오랑캐의 침공을 막기 위해 영변진을 설치하고 약산성을 증축할 때 감독으로 임무를 무사히 마쳤고 다시 총사령관 최윤덕(崔潤德'1376~1445) 막하에서 공을 세워 세종으로부터 작위를 받았다. 임기를 마치고 귀향할 때 뚝향나무를 가지고 와서 주촌에 심었는데 훗날 14세 손 만인(晩寅)이 남긴 '경류정노송기'는 다음과 같다.

"우리 종가 경류정 옆에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있는데, 그 가지와 줄기가 뱀이 서리듯이 널찍하게 얽혀서 왕이 타는 큰 수레의 덮개 같다. 높이는 두 길 정도이고, 아래는 100여 명이 둘러앉을 만큼 넓어 참으로 기품이 있다. 우리 14세 조 선산 공께서 심은 것인데 때는 우리 이씨가 처음으로 여기에 뿌리를 내리게 되던 때다. 세종대왕께서 약산성을 쌓아서 북쪽 오랑캐를 막기 위함이었는데 그때 공이 판관이 되어 그 역사(役事)를 맡아 감독하여 공적을 남겼다. 돌아오실 때 약산의 소나무를 사랑하여 3그루를 옮겨와서 1그루는 곧 여기에 심으시고 또 1그루는 공의 셋째 아들 판서공 계양(繼陽)이 온혜에 터를 잡고 집을 지을 때 그 뜰 안에 심어 지금 이 소나무와 함께 무성하게 자라고 또 1그루는 사위인 해평인 박근손(朴謹孫)에게 주었는데 임란 때 없어지고 전하지 아니한다.

오호라 공은 젊으실 때부터 큰 뜻이 있어서 음사 벼슬에만 항상 맴돌고 있어 그 포부를 다 펴지 못하였으나, 3대를 내려와 큰 선비(퇴계 선생)가 나서 우리 동쪽 나라 천만세의 행운이 되었으니 공은 우리 이씨의 근본이 되었다. 중세 이후로부터 자손이 번창하여 이 소나무 가지처럼 뻗어 갔다. 만인도 역시 이 가지의 하나인데 일찍이 공의 사당에 배알하고 물러나 소나무 아래 휴식하면서 안타까이 어루만지기를 마지아니하였다.

주손 긍연(兢淵) 보(甫)가 말하기를 '이 소나무가 여기에 선 지 오래인지라 생각하건대 아마도 앞사람이 이 소나무에 대한 기록을 전해왔을 듯도 하지만 옛 기록이 전부 인멸되고 다만 김성열(金星說)의 시와 짧은 머리글에 이어 그 원운(元韻)을 화답한 것은 많이 있으나, 일찍이 그 전말을 기록해서 후세 자손에게 전할 만한 것은 없으니 공은 어찌 기문을 쓰지 않으리오'라고 하였다.

만인이 미안하고 죄스러워 다시 말하기를 '여기에 대해서 무슨 일을 해야만 가장 귀한 것인가. 솔이란 차가운 계절의 지조가 있는 것이다. 지금 해가 바야흐로 차가워졌는지라 군과 나는 아무리 곤궁하더라도 의리를 잃지 말고 늦은 후의 절개를 지키기에 더욱 힘써서 조선(祖先)의 본의를 더럽히지 말아야만 조금은 이 솔에 대해서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니 우리는 마땅히 더불어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하니 긍연 보가 말하기를 '비록 무능은 하지만 감히 힘쓰지 아니하리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만인은 조상의 유택에 감개하고 긍연의 척려(, 두렵고 위태로움)함을 가상히 여겨 기문을 쓰노라."

 

기문에 등장하는 노송(老松)은 소나무가 아니라 뚝향나무를 말하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 노송기를 통해 '중세 이후로부터 자손이 번창하여 이 소나무 가지처럼 뻗어 갔다'고 뚝향나무의 은덕을 찬양했다.

당초에 3그루를 가져왔으나 2그루는 죽고 현재 1그루만 남았다.

경류정을 지키고 있는 이세준(李世俊) 님이 후계목 1그루를 키우고 있으며 '선조유적지나무심기운동'을 제안하고 있다. 이 뚝향나무는 다른 문중이 가지고 있지 않은 가문의 보배인 특별한 나무인 만큼 삽목 등의 방법으로 대량 번식하여 진성이문의 재사나 서원, 종가, 정자 등에 심어 다른 문중과 차별화하면 더 좋을 것 같다.

많은 공직자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지역의 토호나 아전들이 주는 금품을 가지고 오는 것이 상례인데 이정 선생은 달랐다. 금은보석보다 뚝향나무를 선택했다. 그 소박한 뜻이 후손들에 이어져 권력보다는 학문에 전념하는 문풍이 이어지지 아니하였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뚝향나무의 수많은 가지처럼 진성이문은 날로 흥해 성리학을 집대성한 퇴계를 비롯한 많은 문과 급제자와 독립 운동가를 배출했다.

더 바란다면 나무문화의 귀중한 사료이자 공의 정신이 깃든 뚝향나무에 대한 노송기가 계속 이어졌으면 한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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