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우리 사회는 대한민국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곧 100세에 이른다는 것을 거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이다. 인생 70부터라는 말도 있지만 요즈음 연세 드신 분들은 신체적 나이에 그다지 구애받지 않고 오히려 자각 연령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 '몇 년을 살았느냐'는 생물학적 나이보다 '몇 살처럼 느끼는가?' '몇 살처럼 보이는가'가 더 중요해지는 것이다.
오늘 출근길에 들은 라디오에서는 76세 할머니가 스스로 체감하는 나이는 이제 겨우 28세라면서 남은 인생 봉사활동에 좀 더 힘쓰겠노라 기염을 토해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해 주었다. 장년층들도 긴 인생 무엇을 하며 보람되게 살아갈 것인지를 벌써부터 대화의 주제로 삼는다. 일부 보험회사들은 상품 가입 연령을 인심 좋게 80대까지 상향 조정하는 등 인생 100살은 별다른 의문이나 타당성 점검 없이 조용히, 그러나 넓고 빠르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퇴근 후 밤 열 시가 다 되어 다녀온 아파트 단지 내 체육관에서는 많은 어르신이 열심히 스트레칭 수업에 참여하고 계셨다. 자기 관리에 열중하는 모습이 인상 깊다는 생각을 하며 밤길을 걸어오다가 평균 수명 100세가 내 한 몸 별 탈 없이 관리만 하면 이루어질 수 있는 꿈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회적, 제도적 지원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평균 수명 100세는 일부 노인들에게나 가능한 일에 그칠 수도 있다는 것이 나의 우려이다.
장수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온 국민이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건강보험제도가 존재해야 한다. 어르신들이 아프면 일반 국민보다 저렴한 가격에 병원을 방문할 수 있는 현행 제도가 꾸준히 간다는 보장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FTA 관련 온갖 이야기들을 듣노라면 이 부분에 대해 상당히 자신이 없어진다. 의료 민영화에 대한 논의는 제쳐 두고라도 대구는 경제자유구역이라 당장 약값이며 의료비가 오를 가능성이 있다는 학계 주장과 이런 주장은 사실무근성 괴담이라는 정부 주장 사이에서 누구 말이 맞는지 확인할 길이 아직은 없다. 닥쳐봐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다국적 기업이 개발해 특허를 내고 높은 가격을 매겨 놓은 의약품을 국내 제약회사에 마음대로 카피해서 쓰라고 호락호락 허락할 리는 만무다. 2000년, 의약 분업으로 가는 혼란 속에 국내 보험제도하에서는 1만 원도 안 하는 카피약을 구하지 못한 부모님을 위해 오리지널 약을 20만 원 넘게 주고 미국에 주문해 본 경험이 있는 터라 약값 무섭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의료 혜택의 가능성과 범위를 경제력이 결정짓게 된다면 100살까지 사는 것은 일부 노인들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되고 만다.
평균 수명 100세 사회로 가는 데 걸림돌이 될 것 같은 또 다른 요소는 약자를 향한 대책 없는 분노 표출이다. 이틀 사이 두 명의 할머니들이 청장년들에게 구타당해 한 분은 숨지고 다른 한 분은 크게 다쳤다는 뉴스가 TV에서 거듭 방송되었다. 약한 학생들을 주된 대상으로 하는 이른바 학교 왕따가 수많은 근절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한 현상이 되어버렸듯이 힘없는 노인에 대한 학대나 폭력 역시 만성적 사회문제로 자리 잡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커진다. TV 속 노인에 대한 폭력을 매일 접하는 서양의 노인들이 자신도 피해자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밤에는 거리에도 잘 나가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가 새삼 떠오른다. 분노조절(anger control) 같은 개인 차원의 해결책보다는 노인에 대한 존중, 약자에 대한 배려, 차이에 대한 관용의 배양 등 사회적 차원의 해결책이 모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100살까지 살기도 어려우려니와 산다고 해도 재앙이 되고 말 것이다.
사람이 오래도록 수명을 누리면서 보람된 인생을 살아간다면 그보다 더 큰 축복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별다른 의심 없이 그렇게 되리라 기대하는 100세 평균 수명은 주로 의료 기술의 시각에서 바라본 것이다. 사회적, 제도적 선행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평균 수명 100세는 공허한 가능성이 되고 말 공산이 크다.
양정혜/계명대 교수·광고홍보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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