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옛길기행] (49)안동 유교문화 길

삭풍에도 독야청청 올곧은 선비정신 걸음걸음 다지고…

하회마을 앞 낙동강을 둘러치고 있는 부용대 절벽에는 옥연정사와 겸암정사를 잇는 옛 오솔길이 있다. 친길(층길)이라 불리는 이 길은 서애와 겸암 형제애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회마을 앞 낙동강을 둘러치고 있는 부용대 절벽에는 옥연정사와 겸암정사를 잇는 옛 오솔길이 있다. 친길(층길)이라 불리는 이 길은 서애와 겸암 형제애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안동 유교문화의 길 가운데 백미로 손꼽히는 병산서원~하회마을 4㎞ 구간. 유교의 덕과 가치를 찾았던 숱한 선비들의 발걸음과 서애와 겸암 형제의 충
안동 유교문화의 길 가운데 백미로 손꼽히는 병산서원~하회마을 4㎞ 구간. 유교의 덕과 가치를 찾았던 숱한 선비들의 발걸음과 서애와 겸암 형제의 충'효 정신이 서려 있는 길이다.
병산~하회마을을 잇는 화산 절벽길 위에서 안동문화지킴이 김호태(왼쪽) 대표와 안동시 역사기록관 최성달 씨가 낙동강과 강을 둘러치고 있는 산을 이야기하고 있다.
병산~하회마을을 잇는 화산 절벽길 위에서 안동문화지킴이 김호태(왼쪽) 대표와 안동시 역사기록관 최성달 씨가 낙동강과 강을 둘러치고 있는 산을 이야기하고 있다.

안동 '유교문화 길'에는 다양한 삶들이 서려 있다. 글 읽는 선비의 이야기와 어려운 세상을 현명하게 살았던 어머니의 이야기가 있다. 추운 겨울 편찮으신 부모님을 위해 잉어를 구해온 효자와 위기의 나라를 구했던 선조들의 이야기, 의좋은 형제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재미있는 산신령의 이야기와 도깨비 전설을 듣고 또 보태며 걸었던 나그네 이야기가 담겨 있다. 수백여년이 흐른 지금, 숱한 이야기와 삶이 스민 유교문화 길이 새롭게 다듬어지고 또 사람들의 발길로 분주해지고 있다.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

안동 '유교문화 길'은 39.6㎞에 이른다. 안동시 풍산읍 낙암정에서 안동시 풍천면 구담리 구담교까지 낙동강 물길을 따라 전통마을과 너른 들을 지나고 병산과 하회마을, 구담 습지를 지난다.

낙암정을 시작으로 풍산한지 공장까지 이어지는 유교문화길 1구간인 '풍산들길' 14.5㎞에는 낙동강생태학습관과 낙강정, 오미리 보호수, 마애석불좌상, 마애선사유적지, 예안이씨 충효당과 종택, 침류정, 풍산장터와 정효각 등 문화재들이 빼곡하다.

유교문화길의 백미인 2구간은 13.7㎞의 '하회마을길'이다. 소산마을과 병산서원, 하회마을, 마을을 둘러싼 자연경관과 마을 사람들에 얽힌 이야기들을 느낄 수 있다. 이 가운데서도 병산서원을 출발해 하회마을까지 이어지는 화산 산길과 낙동강 강변길은 병풍처럼 둘러쳐진 '병산'(屛山)의 절경과 선비의 삶을 고스란히 체험할 수 있다.

3구간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태의 소중함을 체험할 수 있는 '구담습지길'이다. 모두 10.6㎞에 이른다. 이 구간은 하회마을 입구를 출발해 하회마을을 한눈으로 볼 수 있는 부용대와 화천서원, 서애 류성룡 대감과 그의 형 겸암 류운룡의 형제애를 느낄 수 있다. 특히 낙동강 개발공사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놓인 구담습지를 통해 생태의 소중함도 느끼게 된다.

유교문화 길을 새롭게 다듬어 사람들이 찾게 만든 안동문화지킴이 김호태 대표는 "안동지역 가운데 풍산과 하회마을을 아우러는 '유교문화 길'이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한 예안'도산지역과 함께 대표적 문화'역사'자연생태 체험 길"이라고 말했다.

◆병산~하회마을, 굽이치는 낙동강 줄기마다 역사 숨결

병산서원과 하회마을을 오가는 4㎞의 길은 조선시대 유생들이 병산서원으로 공부하러 다니던 옛길이다. '하회마을길'로 불리는 이 길은 들녘을 가로질러 화산(327m)의 산허리를 넘고 다시 낙동강변을 걸어 병산서원에 이르는 호젓한 오솔길로 온갖 야생화와 나무들이 수수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겸암 류운룡을 비롯해 풍산 류씨들의 무덤이 산재한 화산 중턱의 고갯마루에서 뒤를 돌아보면 하회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너 명이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넉넉한 산길은 최근 정비를 한 덕분에 평탄하다. 나무 터널을 통과하고 골짜기를 지나면 길은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오솔길로 좁아들고 칡꽃의 은은한 향기가 온몸을 휘감는다. 길은 이내 낙동강변의 왕버드나무 군락을 벗한다. 이어 과수원과 낙동강변 솔밭을 지나면 여름철 배롱나무 꽃이 만발하는 병산서원에 다다른다.

이 길을 따라 서애 선생을 흠모하고 따르던 조선, 영남의 숱한 선비들이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을 오고 갔다. 퇴계 선생을 중심으로 학봉과 서애의 위패 좌우 배향, 후일 대산 이상정의 추가 배향을 둘러싸고 빚어졌던 '병호시비' 과정에서 선비들의 숱한 고뇌와 자존심, 학맥과 문중의 대립 등 역사적 흔적이 묻어 있는 길이다.

이 길에는 '서애를 도와 왜군 장수를 물리키게 한 형 겸암', '여우 동생을 물리친 겸암', '서애대감을 구한 돌고지 바위', '태몽을 산 서애대감 어머니' 등 서애와 겸암 형제를 둘러싼 숱한 이야기들이 전해 온다.

최성달 안동시 역사기록담당관은 "하회마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병산서원을 찾는 관광객들이 엄청나게 늘었다.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을 잇는 옛길이 안동의 유교'선비문화를 체험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길을 둘러싼 다양한 스토리텔링 작업을 통해 새로운 지역 명소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겸암'서애 형제들의 정과 사랑 서린 '부용대 층길'

하회마을 만송정 앞 낙동강을 둘러치고 있는 부용대 절벽, 절벽 우측에 옥연정사(중요민속자료 제88호)가 있다. 정사 마당에는 수백년 된 노송이 버티고 섰다. 서애가 제자들과 함께 심었다고 전한다. 서애 소나무는 옥연정사와 부용대 절벽 곳곳에서 울울창창 솔숲을 만들어 놓고 있다.

서애와 그의 형 겸암 형제의 우애는 부용대 절벽에 좁다랗게 난 '층길'(친길)에서 고스란히 전해온다. 서애가 1586년 옥연정사를 지어 부용대 절벽 반대편 입암 위에다 '겸암정사'(중요민속자료 제89호)에서 후학들과 연구하던 형을 만나러 갔던 길이다. 이 층길은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180년 전 하회마을(1828년 하회마을) 그림에서 사실적으로 묘사된 것이 알려지면서 세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한 사람이 겨우 발을 내디딜 정도로 좁다란 500여m의 절벽길은 서애가 아침저녁으로 형 겸암을 찾아다녔던 발자국의 여운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발아래로는 깎아지른 절벽과 바위, 낙동강 물결이 정신을 아찔하게 한다. 머리 위로는 까마득한 층층바위가 덮치듯 내려다 본다.

옥연정사에서 고택체험을 운영하는 김정희(44) 씨는 "예전에는 층길이 3곳이었다고 전해 온다. 지금의 층길 아래와 위쪽으로 더 있었다고 한다. 서애는 형님에게 무언가를 전해줄 때는 손수 지게를 지고 지금의 층길을 걸었다"고 말했다.

층길이 끝날 즈음 눈앞에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가로막는다. 이 나무들도 서애가 먼저 세상을 떠난 형님을 그리워하며 제자들과 함께 심었다고 전한다. 향나무와 상수리나무로 둘러싸인 겸암정사는 입암 절벽 위에 버티고 서서 하회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겸암정사 입구에는 '겸암사'라는 시 한편이 새겨져 있어 형에 대한 서애의 애틋함이 묻어난다.

'내 형님 정자 지어 겸암이라 이름지었네,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쓸어내리고 매화는 뜰가득 피어있구나, 발끝엔 향그런 풀냄새 모이고 호젓한 길에는 흰 안개 피어나네, 그리움 눈물되어 소리없이 내리고 강물도 소리내며 밤새 흐르네'

◆서애 류성룡, 임진란 7갑주년 앞두고 충절 새로워

하회마을은 산과 강이 'S'자 모양으로 어우러져 '산태극(山太極) 수태극(水太極)'이라고 한다. 연꽃이 물에 떠 있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모습을 띠고 있다. 또 행주형(行舟形)이라 해 마을에 우물을 파지 않는다.

이 마을에는 충효당과 양진당이 대표적 종가로 두 기둥을 이루고 있다. 또 이 마을에는 남촌댁과 북촌댁이 반가의 두 기둥으로 버티고 서서 상하를 어우러지게 한다. 그뿐이랴, 화천서원과 병산서원이 또한 두 서원으로 학문적 기둥을 이루고 있다. 옥연정사와 겸암정사가 서로 교류하며 마을의 기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병산서원은 서애가 후학을 길러내는 도량으로 삼았다. '차경'(借景)!. 경치를 빌려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살았던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 있는 말이다. 병산서원의 만대루에서 바라본 병풍절벽과 낙동강은 한 폭의 그림이다. 이곳은 지금에 와서도 한 번쯤 다녀가지 않으면 건축학도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하고 있다.

내년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420년 되는 해이다. 60년마다 되풀이되는 '1갑주'년마다 조선의 왕들은 도백들을 임진왜란에 공이 있는 서애를 비롯해 전국 9공신들의 사제사와 단제사를 모셨다. 7갑주년을 앞두고 서애의 충절이 새롭다.

임진왜란을 치른 탁월한 공신 서애가 받은 서훈은 거창하다. 조선국(朝鮮國)을 시작해 수충(輸忠) 익모(翼謀) 광국(光國) 충근(忠勤) 효절(效節) 호성공신(扈聖功臣) 등의 칭호에 풍원부원군의 봉호를 받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글자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한 그의 충과 효가 담겨있다.

서애는 임진왜란 1년을 앞둔 시점에서 혁신적 인사를 천거했다. 형조정랑 권율을 의주목사로, 정읍현감 이순신을 전라좌도수사로 삼았다고 서애연보에 나타난다. 현감을 수사에 오르게 한 것은 지금의 6급을 3급에 발탁한 것이나 다름없다. 서애의 탁월한 안목이 나라를 구한 결과가 됐다.

하지만 서애는 큰 공훈에도 불구하고 당파싸움에 밀려 노년기를 불우하게 은거했다. 그는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언덕을 오르지 않으면 올 수 없는 옥연정사에 은거하며 징비록을 썼다. 혹독한 전쟁과 이후 가난과 병마로 비참했던 서민들의 살림살이, 그 대책과 비방을 조목조목 적어 후세에 경계토록 했다.

서애가 "이제야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만 다만 뒷날에 경계로 삼아야 하겠기에 자세하게 적어둔다"고 한 징비록 저작 목적이 새롭게 와 닿는다. 나라가 어려우면 생각나는 재상 서애, 형제와 우애 있게 지내고 홀로 되신 어머니를 걱정해 안동 인근 벼슬길을 자처했던 류성룡, 하회마을 곳곳에서 그의 뜻이 오롯이 전해지고 있다.

안동·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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