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고향의 맛] 2박 3일

가을의 마지막 향연 단풍 잔치는 눈이 누릴 수 있는 호사의 극치

노란색 붓질이다. 하나님은 1년에 두어 번씩 노란색 칠을 하신다. 물감을 듬뿍 묻힌 기다란 붓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별의 곳곳을 아름답게 채색하신다. 봄에는 개나리가 피는 둔덕에, 가을에는 은행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선 길가에 노랑 물감을 흩뿌려 옐로 파티를 여신다. 천지창조를 하실 때 빛을 지으시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듯이 요즘은 봄가을로 노랑물을 뿌리시고 '보시기에 좋은' 제2의 색깔 창세기를 구가하고 계신다.

KBS '6시 내 고향' 프로그램에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따라가던 리포터가 강원도 고성 쪽의 어느 항구로 들어선다. 노란 색깔이 두 눈에 가득 들어오니 벌써부터 내 가슴은 뛰기 시작한다. 그 친구는 어선을 얻어 타고 바다 복판으로 나가 비싸고 귀한 생선인 복어를 가득 잡아 돌아온다. 선창에 차려둔 평상 위에서 회 뜨고 백탕 끓이고 부산하게 돌아다닌다. 부럽기도 하고 질투가 나기도 한다. 몇몇 여행 도반들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나도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는 열에 들뜬 음성이었다. 그래서 이틀 뒤 우리도 출발했다. 6명.

우리는 가을 산이 붉은 스카프를 두르고 남으로 남으로 달려 내려오고 있는 강원도 산골 초입으로 들어섰다. 사느라 한참 동안 잊어버린 탄성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바다를 만나러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달려온 산들은 푸른 물결에 몸을 맡겨도 좋다는 듯 노란 단추를 있는대로 다 풀어 제치고 두 팔 벌려 풍덩하고 뛰어들 기세다.

바다는 참 좋다. 바닷가 노란 가로수 길은 더 좋다. 하나님의 심미안은 정말 대단하시다. 노란 붓질을 하다말고 나무 밑 부분에는 물감을 나이프로 찍어 바른 것 같이 덧칠을 두껍게 하신 것 같다. 또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는 포도 위에는 설화(雪畵)를 그릴 때 붓 끝에 묻어 있는 물감을 뿌린 것처럼 노란 점들이 듬성듬성 떨어져 있다. 휘익 하고 바람이 불면 노란 점들은 은행잎으로 변해 이리 날리고 저리 날린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액자에 끼워 넣으면 그림의 명제를 무어라 해야 할까.

가을의 마지막 향연인 단풍 잔치는 눈이 누릴 수 있는 호사의 극치다. 단풍 색깔은 햇빛의 축복 속에 역광으로 비칠 때 최고로 화려 찬란하다. 그러나 우리의 여행길은 그런 행운은 누릴 수 없었다. 영동 지역 비, 영서 지역 구름이란 일기 예보가 빗나가기를 은근히 바랐지만 국지성 폭우와 폭설이 내릴 땐 헛다리짚기가 일쑤인 기상대가 오늘 따라 한 치의 오차 없이 맞추고 있다.

햇빛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글루미(gloomy) 블루(blue) 그레이(gray)라는 단어들이 갖고 있는 축축하고 어둑어둑한 분위기들은 밝은 햇빛과는 정반대의 개념들이지만 그것 또한 얼마나 좋은가. 진부령을 넘어갈 때 우리들의 진로를 막아서며 희롱하던 산안개는 그렇게 운치로울 수가 없었다. 산안개는 햇빛이 쨍쨍한 날에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감정의 밑바닥을 쓸고 지나가는 회오리 같은 것이었다.

'예술이 마음을 흔드는 바람 같은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자연은 한 수 더 높은 경지에서 사람의 영혼을 관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단풍과 바람과 산안개에 마음을 빼앗겼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점심 먹을 시간이 훨씬 지나 있었다. 배 속에선 쪼르륵 소리가 났지만 국밥이나 자장면으로 한 끼를 때우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린 출발 할 때의 목표지점인 거진항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동해 최북단인 거진항에는 TV화면에서 본 복어들이 비좁은 고무 다라이 안에서 지겨운 하품을 하고 있었다. 아까는 기상대의 일기예보가 적중하더니 지금은 '6시 내 고향' 리포터의 '복어 천지'라는 코멘트가 그렇게 정확할 수가 없다. 복어 값은 엄청 선량했다. 살아 있는 1㎏짜리 밀복 한 마리 값이 단돈 2만5천원. 그건 경북의 바닷가 회집의 양식 광어 값보다 오히려 싼 값이었다. 밀복 세 마리(3.5㎏)를 거진항 난전 세 자매네(010-3093-1376)에서 7만5천원에 샀다. 인근 식당으로 몰려가 복어회와 백탕을 앞에 두고 '2박 3일'하고 크게 외쳤다. 강호동팀은 '1박 2일'이지만 우린 '2박 3일'이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도 빙긋 웃으시는 걸 나는 똑똑히 보았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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