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국회 선진화법

1917년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1차 세계대전 참전을 위해 상선들을 무장시킬 권한을 의회에 요청했다.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개시한 독일이 "모든 미국 선박을 격침시키겠다"고 미국에 통고한 때문이다. 멕시코 땅을 미국 침략의 전초기지로 빌려준다면 미국-멕시코 전쟁 때 미국에 빼앗긴 지역을 돌려주겠다는 독일 외무차관 짐머만의 문서가 도화선이었다. 상선 무장 법안은 압도적 표차로 하원에서 가결됐다.

법안이 비준을 위해 상원에 올라오자 철저한 반전주의자인 조지 노리스 등 몇몇 의원들은 법안 저지를 위해 정기 의회 폐회 때까지 표결을 지연시키는 꼼수를 썼다. 발언 시간을 최대한 늘려 표결을 못 하도록 하는 시간 벌기 작전을 편 것이다. 이처럼 의도적인 의사 진행 방해 행위를 일컬어 필리버스터(filibuster)라고 한다. 주로 소수가 다수의 독주를 막으려고 합법적인 수단을 동원해 고의적으로 방해하는 것이다.

1929년 중의원에서 처음 등장해 일본 국회의 전통이 되다시피한 '규호(牛步)전술'은 소걸음처럼 느리게 연단에 나서거나 투표 진행을 지연시키는 방해 행위로 유명하다. 1992년 PKO 법안 저지를 위한 문책결의안 투표에 무려 13시간 8분을 소요, 최장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969년 신민당 박한상 의원이 3선 개헌을 막기 위해 10시간 동안 질의한 것이나 1964년 김대중 당시 의원이 5시간 19분 동안 연설한 것도 눈에 띄는 필리버스터 사례다.

필리버스터의 폐단도 없지 않아 많은 나라가 발언 시간을 제한하거나 토론종결제 등으로 보완하고 있지만 합법적 수단이라는 점에서 폭력 등에 의한 방해와는 다르다. 공중부양 쇼가 벌어지는가 하면 전기톱과 해머가 난무하고 최루탄까지 터뜨리는 대한민국 국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신사적인 방법이다.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 등 23명이 1일 국회에서 최루탄을 터뜨린 김선동 민노당 의원을 윤리위에 제소했다. 국회 폭력 추방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이지만 제도적으로 이를 근절하기 위한 '국회 선진화법'은 여전히 잠을 자고 있다. 필리버스터 도입과 안건 신속 처리제를 골자로 한 이 법안이 여야 합의에도 5개월째 표류 중인 것이다. 임기 내내 폭력으로 얼룩졌던 18대 국회는 결자해지의 각오로 반드시 이 법을 통과시켜야 한다. 폭력과 몸싸움이 설쳐대는 국회를 두 번 다시 보고 싶어하는 국민은 없다.

서종철 논설위원 kyo425@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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