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동거가 사회적 이슈로 부상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동거를 거론해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 동거를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시선은 곱지 않다. 동거가 '음란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방적인 성문화와 전통적 가족질서의 해체 등으로 동거문화는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대학가 또는 원룸이 밀집한 주택가에서 동거 커플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동거가 이미 생활의 한 양식으로 자리 잡았음을 의미한다. 동거가 논란의 중심이 된 것을 계기로 우리나라 동거문화의 현주소를 알아봤다.
◆동거는 드라마'영화의 주요 소재
한때 금기시되었던 동거가 드라마 또는 영화의 주요 소재로 자리 잡았다. 지난달 10일 개봉된 영화 '너는 펫'은 애완동물 같은 연하남과 능력 있는 연상녀 커플의 동거생활을 코믹하게 그린 작품이다. 인기리에 방송되다 올 5월 종영된 KBS 일일연속극 '웃어라 동해야'에도 동해와 새와가 한때 동거를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 지난해 방송된 MBC 드라마 '개인의 취향'과 SBS 드라마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를 비롯해 MBC 드라마 '환상의 커플'과 '옥탑방 고양이', KBS 드라마 '풀 하우스' 등도 동거코드를 아기자기한 이야기로 풀어 놓았다.
특히 2003년 방송된 '옥탑방 고양이'는 당시 동거라는 파격적인 소재를 채택해 화제가 되었으며 이후 동거가 드라마의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흥미로운 점은 동거를 소재로 한 드라마들이 대부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시청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는 것이다. 동거가 대중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콘텐츠임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결과다.
최근에는 연극과 뮤지컬, 예능프로그램까지 동거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옥탑방 고양이'는 연극으로 제작되어 전국에서 인기리에 공연되고 있으며 독신남녀의 사랑'이별'결혼'동거 등을 그린 로맨틱 코미디 영화 '싱글즈'(2003년 개봉)도 뮤지컬로 재탄생해 현재 공연되고 있다. 부부라는 설정 아래 연예인들의 동거생활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MBC 예능프로그램 '우리 결혼했어요'는 수년 동안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다.
이에 대해 차우진 대중문화평론가는 "미디어 속 동거문화는 우리 사회의 변화된 연애관을 보여주는 일면이다. 중국이나 일본 등 아시아권 국가만 봐도 동거는 더 이상 사회적인 이슈가 아닌 문화로 젖어들었다. 동거는 이제 여성들의 피해나, 남성들의 폐해로 여겨지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동거 인구가 늘어나고 있음을 감안하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고 설명했다.
◆현실에서도 동거는 보편적인 문화
대기업에 다니는 최모(50) 씨는 퇴직 후 생활에 대비하기 위해 올해 대학가 주변에 원룸을 신축했다. 대학을 끼고 있어 원룸은 쉽게 임대가 됐다. 하지만 최 씨는 임대 현황을 보고 동거하는 젊은 남녀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16개 원룸 가운데 동거 커플에게 임대된 것은 전체의 75%인 12개로 세입자는 대부분 대학생들이었다. 최 씨는 "예전에 비해 동거하는 대학생들이 많아졌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예상도 못 했다. 대학생 딸을 키우고 있는 입장에서 걱정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고 말했다.
또 인터넷에는 동거인을 구하고 알선해 주는 사이트들이 운영되고 있다. 회원 수 5만여 명을 자랑하는 한 사이트 게시판을 방문해 보니 동거 파트너를 구한다는 글과 함께 여행을 떠날 사람을 찾는 문구가 가득했다.
동거를 바라보는 시선도 많이 달라졌다. 마음이 맞는 남녀가 결합하는 방식으로 결혼이 전부인 줄 알았던 기성세대와 달리 요즘 젊은 세대는 동거에 개방적이다. 지난해 결혼정보업체 웨딩스쿨이 전국의 미혼남녀 회원 720명을 대상으로 '신(新) 살아보고 결혼하자'에 대해 설문조사를 한 결과, '혼전 동거를 찬성한다'는 의견이 전체 63%를 차지했다. 반면 '혼전 동거에 반대한다'는 의견은 37%에 불과했다.
찬성 이유로는 '결혼할 사이라면 괜찮다'고 응답한 비율이 35%로 가장 높았으며 ▷'사랑하는 사이라면 문제될 것이 없다'(15%) ▷'경제적 문제 때문에 할 수 있다'(10%) ▷'이혼을 막기 위한 한 방안'(3%) 등이 뒤를 이었다. 반대 이유로는 '성에 대한 무책임함 때문에'가 20%로 1위를 차지했으며 '사회 통념상 절대 그래선 안 된다'가 10%, '재혼과 다를 것이 없다'가 7%로 조사됐다. 웨딩스쿨 관계자는 "동거에 대한 젊은 층들의 관념이 개방적으로 많이 변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결과다. 외국 문화를 많이 접하는 젊은 층에게 동거는 금기가 아닌 선택이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이혼 경력이 있는 남녀는 동거에 보다 적극적이다. 올 9월 재혼전문 중개사이트인 '온리 유'와 결혼정보회사 비에나래가 재혼을 희망하는 전국의 이혼 남녀 510명을 대상으로 '재혼 대상자와 결혼 전 동거의 필요성'에 대해 설문조사를 한 결과에 따르면 남성 응답자의 69%와 여성 응답자의 61.2%가 '결혼 전 동거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재혼 전 동거의 의미'에 대해서는 남성은 ▷'성적 조화 확인'(37.3%) ▷'애정 확인'(27.1%) ▷'생활습성 파악'(25.7%) ▷'결혼의사 파악'(7.2%) 등의 순으로 의미를 부여했다. 여성은 '생활습성 파악'(34.9%)이라고 응답한 경우가 가장 많았으며 ▷'성적 조화 확인'(29.6%) ▷'결혼의사 파악'(16.9%) ▷'애정 확인'(15.6%) 등이 뒤를 이었다. 비에나래 관계자는 "재혼 대상자들은 초혼에 비해 성에 대해 매우 개방적이다. 잠자리나 동거를 상대를 파악하는 과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동거 백태
사람들이 동거를 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개인적인 특성은 있지만 동거 유형은 크게 ▷가출형 ▷생계형 ▷결혼 회피형 ▷결혼 전제형 네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가출형은 집을 나와 동거를 시작하는 경우다. 주로 10대들에게 나타나는 동거 유형이다. 고등학교 2학년 김모(17) 군은 6개월 전 가출을 한 뒤 동갑내기 여고생과 동거를 하고 있다. 현재 김 군은 학교에도 가지 않고 있다. 학교에 가면 부모님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김 군의 부모는 아들이 하루빨리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김 군의 부모는 "가출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아들이 결혼을 시켜 달라며 집을 찾아왔다. 꾸짖고 달래고 타일러도 말을 듣지 않아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그 이후로는 부모 전화도 받지 않고 있어 소재를 파악할 방법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생계형은 동거생활을 선택하는 데 경제적인 이유가 한몫을 한 경우다. 대학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거 형태다. 대학에 다니는 박모(26) 씨와 지모(23'여) 씨는 대학 주변 원룸에서 2년째 동거를 하고 있다. 학과 선후배 사이인 둘은 집에는 동거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있다. 하지만 가까운 친구들은 그들의 동거를 알고 있다. 이들은 "같은 시험을 준비하다 가까워져 함께 생활하게 됐다. 같은 공부를 하고 있어 서로 의지가 되고 생활비도 아낄 수 있는 이점이 있다"고 했다.
결혼 회피형은 결혼은 부담스러운데 좋아하는 사람과는 같이 있고 싶어 동거를 선택한 유형이다. 여자 친구와 1년째 동거를 하고 있는 직장인 윤모(26) 씨는 "여자 친구도 나이가 많지 않아 결혼을 해야 할 상황은 아니다. 결혼보다 함께 있고 싶어 동거를 시작했다. 운전해서 왔다 갔다 할 필요도 없고 여러 가지로 편하다. 누가 옆에 있으니 외롭지 않아 좋다"고 말했다.
결혼 전제형은 결혼을 위한 '중간 정거장'으로 동거를 선택한 경우다. 회사원 박모(28'여) 씨는 영국인 남자친구와 결혼을 전제로 동거를 하고 있다. 부산이 고향인 박 씨는 집안 어른들에게 허락을 구한 뒤 6개월 전 동거를 시작했다. 박 씨는 올해 말 영국에 있는 남자친구 부모에게 인사를 다녀온 뒤 내년 봄쯤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다.
◆동거를 보는 시각은 답보 상태
동거가 널리 퍼져 있지만 유교적인 성향이 강한 우리나라에서 동거를 보는 시각은 여전히 부정적이다. 동거하는 사람은 과거에 비해 크게 늘었지만 이들을 보는 시각은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이다. 동거문화를 받아들이자는 입장에서는 "동거는 이혼율을 낮추고 이혼에 따른 후유증을 줄일 수 있는 등의 장점을 갖고 있다"고 강조한다. 반면 동거문화를 터부시하는 쪽에서는 "신성한 결혼의 의미가 퇴색될 수 있다. 결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동거는 오히려 큰 불행을 초래할 수 있다"는 등의 반박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개방적인 성문화로 인해 동거가 더욱더 확산될 것이라는 데는 동거 찬성론자나 반대론자 모두 의견을 같이한다. 동거를 바라보는 시각과 현실 사이에 심각한 괴리 현상이 존재하는 만큼 우리 사회가 이를 줄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점점 힘을 얻고 있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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