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살아있는 시간들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모모는 생을 쫓아가는 시곗바늘이다. 그런데 왜 모모 앞에 있는 생은 행복한가.' 그야말로 철없던 시절, 그냥 겉멋으로 흥얼거리곤 했던 '모모'라는 노랫가락이다. 그 노래의 줄기를 따라가다가, 같은 제목의 동화소설을 만났다. 독일의 아동문학가 미하엘 엔데의 '모모-시간 도둑들과 도둑맞은 시간을 인간에게 찾아주는 꼬마에 관한 따뜻한 이야기'(1973). 색 바랜 앞장에 끌쩍거려 놓은 날짜대로라면 칠락팔락으로 설쳐대던 의예과, 제 앞에 놓인 시간도 주체 못하던 시절이다.

"나는 당신에게 이 모든 것을 이미 있었던 일처럼 얘기했습니다. 어쩌면 이 이야기가 미래에 일어날 것으로 얘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책 말미에 덧붙인 나름 의미심장한 작가의 경고문도 그때엔 십중팔구 쇠귀에 경 읽기였으리. 숱한 소중한 것들은 지나간 뒤에, 혹은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인가?

영화 '모모'(Momo, 1986)의 무대는 폐허가 된 원형극장이다. 꼬마 소녀 모모는 친절한 이웃들과 또래 어린이들과 어울려 즐거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회색의 도당들이 나타나면서 평화로운 삶은 걷잡을 수 없이 망가지기 시작한다. 첫 번째 대상인 이발사에게 다가가 달짝지근한 사탕발림과 함께 을러댄다. 손님들과 한가하게 정담을 나누지 말고, 연인에게 꽃다발을 건네노라 금쪽같은 시간을 낭비하지도 말라고. 늙고 병드신 어머님도 구차스럽게 보살피는 대신에 당장 고급 요양소로 보내버리라고. 그리고 더 이상 돈이 되지 않는 노래 부르기와 책읽기, 또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짓거리를 그만두라고. 당신의 조수가 한눈팔 틈을 주지 않도록 크고 성능이 좋은 시계를 걸어 놓으라고 다그친다. 인간의 모습을 한 이들의 꼬임에 빠져 사람들은 허둥지둥 시간을 아끼려고 바동거리다가, 점차 지쳐가고 메말라 간다. 이윽고 사람들은 시간은 아끼면 아낄수록, 점점 시간이 없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 전에 옛사람에게서 이렇게 들었다/ 말이 달릴 때 필요한 땅은/ 말발굽 닿는 면적만큼만 필요하다/ 그러나 그 면적만 남기고 나머지는/ 벼랑을 만들어도 말은 달릴 수 있나(중략) 발굽만큼 남은 땅을 길이라 하는 거냐/ 말이 유기물인 만큼 길은 연속적이다/ 밟지 않은 곳/ 남겨진 그곳/ 풀이 자라고 꽃이 피고 지는 곳은/ 그곳인데.'(백무산의 '살아있는 길' 중에서) 마냥 시곗바늘에 허겁지겁 쫓기는 죽은 길이 아니라, 풀도 자라고 꽃도 가꾸어가는 살아있는 길들과 함께하기를 꿈꾸어 본다. 때로는 뒤도 돌아보고 옆으로 눈길도 주면서 말이다. 또 한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해가 다가온다.

송광익 늘푸른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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