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에 눈이 내리면
청솔가지 꺾어들고 오는
하얀 버선코,
사슴의 무리가 눈을 뜬다
지붕 밑 동박새가 살을 부빈다
마을에서도 숲에서도
눈은 내리고
누군가 흰 고무신 눈발 속을
조심조심
미끄러져 가고 있다
(중략)
나는
세계의 가장 평안한 우차에 실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잘도 넘어 간다
-서지월 '조선의 눈발' 일부
문경새재 옛길에 겨울이 오고 눈이 내렸다. 한 시인은 '조선의 눈발'을 문경새재에서 그려냈다.
◆옛길의 대명사
문경새재는 웬 고개인가? 왜 이 고개를 넘었어야만 했는가?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그 할아버지도 넘던 길을 오늘 간다. 골골이 부딪쳐 오는 개울의 부대끼는 소리를 떠나간 사람들의 그리움으로 듣는다. 솔바람 소리에 따라가는 가슴 한구석 간지럽도록 시린 이 별리(別離)의 길. 오늘 또 무슨 사연을 길 위에 남기고 우리는 넘는가?
문경새재만 들어서면 한없이 쌓인 삶의 시린 조각들을 세운다. 서리서리 둘러싸인 삶의 설움이 이곳에만 오면 탁 풀어진다.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이야기 속에 내 혈육이 남긴 사연들도 있으리란 기별(奇別)이 오고, 핏줄은 수액을 빨아올리는 나무가 된다.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연의 한 개체가 된다.
문경새재가 시작되는 진남교반 고모산성에서 첩첩 접힌 산맥의 굵은 마디를 보다가 문경새재 본 길에 들어서면 비로소 자연의 하나였음을 깨닫게 되는 것 같다.
길이라고 다 길이 아니다. 이쯤은 돼야 길이라 이름하리라. 하숙생 같은 인생을 다 담고도 시침을 떼듯이 떡 누워서 일어설 줄 모르는 이런 배짱쯤은 돼야 길이라 하리라. 밖에서는 온통 작은 성쇠(盛衰)에 울고 웃는 아우성인데도, 태평하게 중세의 삶을 털지 않고 있는 문경새재. 이 길에서 어찌 우리가 조급한 IT시대를 들먹일 수 있으리오.
오르막길 사십리 내리막길 사십리
(경상도길 사십리 충청도길 사십리)
팔십리 문경새재 해가 저문다
님 찾아 가자하니 고향 그립고
고향에 머물자니 님이 그리워
오도가도 못 하겠네 가도오도 못 하겠네
팔십리 문경새재
이 소리는 문경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하며 부르는 구전가요다. 구전민요는 있어도 구전가요가 있다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다. 문경새재 옛길에는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이야기도 많고 소리도 많다.
그만큼 문경새재 옛길에는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사람들의 마음까지 담겨있다.
어느새 국민 관광지, 휴양지, 트레킹 장소가 된 문경새재 옛길은 황토와 마사토가 잘 섞인 흙길로 남아있다. 산업화와 새마을운동 속에서도 꿋꿋하게 옛 모습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에 위치한 조령 옛길인 문경새재는 조선 태종 14년(1414년)에 관도로 개통되면서 영남과 기호지방을 잇는 영남대로 중 가장 유명한 구간으로 세종실록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돼 있다. 특히 조선시대 영남지방 선비들의 한양 과거 길로 유명하다. 3개의 관문 및 원터 등 주요 관방시설이 잘 남아 있고 멸종위기의 동'식물 서식지가 널리 분포돼 있는 등 역사적'민속적'생물학적 가치가 큰 옛길인 것이다.
◆이제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문경새재는 조선팔도 고갯길의 대명사가 된 지 이미 오래다. 문경새재만큼 길과 관련된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에 대한 가치가 돋보이는 길은 흔치 않다.
'문경새재'하면 먼저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 과거 길을 오르던 선비들이 떠오를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기쁘고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문경(聞'들을 문, 慶'경사 경)이라고 했다고 한다. 또 '새재'라는 말의 유래는 '새들도 날아가기 어려운 높은 고개', '억새풀이 많은 고개', '새로 뚫린 고개', '길과 길 사이에 난 고개' 등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으나 모두 문경새재가 지니고 있는 역사적'문화적 의미를 담아내고 있는 말들이다.
옛길박물관의 안태현 학예사는 "이제 문경새재는 우리나라의 옛길, 문화유산가치를 넘어 세계문화유산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국내에서 관장하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한국위원회는 문경새재의 세계유산 등재 신청을 추진하고 있어 좋은 결과가 기대된다는 것이다.
경상북도는 백두대간 역사문화지리지구를 세계유산화 하는 세미나에서 문경새재를 당연히 포함한 바 있다고 밝혔다. 또 충북에서 추진해 잠정목록에 오른 중부내륙산성군의 세계문화유산에도 문경새재 일대의 산성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문화유산의 보고
문경새재도립공원을 넘어 옛길로서는 처음 국가지정문화재(명승 제32호)로 지정된 이곳에는 각종 문화재와 희귀 동식물이 널리 분포돼 있다.
먼저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147호로 지정돼 있는 조령관문은 각각 주흘관(제1관문), 조곡관(제2관문), 조령관(제3관문)으로 명명돼 그 위용을 자랑하면서 호국의 정신을 되새기게 한다. 임진왜란 때는 군사적으로 천혜의 요새인 이곳을 막지 못해 한양이 쉽게 함락되었고 선조는 의주까지 피신을 가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임진왜란의 쓰라린 경험으로 나라에서는 문경새재에 성을 쌓게 했는데 선조 때 가장 먼저 2관문을 쌓았고, 그 후 숙종 때 1관문과 3관문을 쌓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순수 한글 비석인 '산불됴심' 표석(도지정 문화재 226호)은 불조심의 교훈을 아직도 전하고 있어 자연을 아끼고 사랑했던 선조들을 엿볼 수 있다. 고려 말 공민왕이 피란을 가면서 이곳에 머물렀다는 절 혜국사도 있다. 옛날 여행객들의 편의를 제공하던 원(院)터, 군사들이 진을 쳤던 군막터, 관찰사의 업무를 인수인계하던 교귀정, 나그네가 쉬어 가는 주막, 성황당, 산신각, 선정비군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최근에는 드라마세트장이 자리 잡아 한 해 300만 명의 관광객이 몰리고 있으며, 문경전통찻사발축제와 문경사과축제 등 철마다 열리는 축제의 공간이기도 하다. 자연생태공원과 전시관도 들어섰다.
지난 2007년 문경새재가 명승 제32호로 지정되면서 국내 최초의 길 전문박물관인 '문경 옛길박물관'이 문경새재에 자리 잡게 됐다. 우리나라 옛길의 역사와 문화가 유물과 콘텐츠로서 당당하게 전시돼 있다.
◆문경새재를 위한 찬가 '문경아리랑'
지난 10월 20일 문경새재 옛길박물관에서는 '다시 넘는 문경새재'라는 주제의 박물관대학이 개강했다. 이 강의에는 영남대로라는 말을 학계에 정착시킨 고려대 최영준 교수, 조령관문의 역사성을 재조명한 충북대 차용걸 교수, 우리나라 아리랑에서 문경새재 아리랑이 차지하는 가치를 이야기한 경북대 김기현 교수 등의 강의가 지난달 말까지 10차례에 걸쳐 이어졌다. 이 밖에 부산대 한태문 교수의 조선통신사와 문경새재, 최근 오케스트라 곡으로 문경새재를 작곡한 성신여대 이인식 교수, 문경새재의 민속을 해석한 안동대 한양명 교수, 문경새재 주변의 한시를 소개한 경북대 황위주 교수의 강의가 있었다.
김기현 교수는 " '문경새재 아리랑'은 문경의 '모심기소리', '나무하는 소리'로 불려진 서민들의 노동과 삶 속에서 구연되었던 토속소리인데, 19세기 경북궁 중창 등과 같은 새로운 역사 문화적 상황에서 통속화의 길을 가게 됐다"고 주장했다.
현재 '문경새재 아리랑'은 모심기와 같은 노동의 현장에서 불리는 향토민요 아리랑과 전문소리꾼에 의해 창작된 통속민요 아리랑으로 구분되며, 지역적 구심과 통속적 원심을 살려 문경의 지역아리랑으로 전승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김 교수는 "'문경새재 아리랑'은 20세기 이후 다른 개체요와 '아리랑'사설에 영향을 주었다"면서 "강원도지역의 아리랑에도 맥을 대고 있고, 살아 있는 향토의 토속민요 아리랑"이라고 주장했다.
황위주 교수는 "문경새재와 관련한 주변의 한시를 조사한 결과 무려 375제 415수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었다"며 자료집의 편찬과 번역 작업의 시급성을 강조했다. 그는 "이 자료에서 발견되는 문경새재와 관련된 흥미로운 유적지가 새롭게 조사되고 복원되어야 하며, 노변의 시비 등도 스토리가 있는 것으로 재정비하고 이를 통해 더욱더 흥미로운 문화콘텐츠가 개발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인 모두의 옛길
올레길, 둘레길, 자락길, 외씨버선길, 퇴계오솔길, 십이령바지게길, 대관령옛길 등 옛길이 새로운 문화 추세로 각광을 받고 있다. 너무 빠르게 살아온 우리들의 자각의 산물이다.
문제가 꼬이면 걸으라는 말이 있다. 길이 단순한 이동수단으로만 존재했던 것이 아닌 것이다. 길은 이렇게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고, 삶의 모습을 담고 있기도 하다. 내리막길, 오르막길, 굽이 길, 곧은 길, 울퉁불퉁한 길, 평평한 길…. 그런 길들이 인생의 길과 너무도 닮아 있는 것이다.
일체의 잡스러운 것이 없는 자연스러운 길에 옛 사람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간직돼 있는 사유의 공간인 것이다.
인간의 길인 문경새재는 길의 모든 요소들을 다 간직한 한국인 모두의 길이다.
문경'고도현기자 dory@msnet.co.kr 고성환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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